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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의 이상향, 광한루와 요천수

[남원문화통신 10]




[그린경제=가람 기자] 춘향전의 배경지로 잘 알려진 광한루원(廣寒樓苑. 명승 제33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원래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26년 (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 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면서부터 광한루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송강정철에 의해서 이상향의 세계인 월궁을 상상하며, 확장 한 것이 오늘날의 광한루 형태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광한루에도 걸려있는 편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철의 전라관찰사시절을 노래한 그의 시, “청풍명월”을 소개한다.


청풍명월속에....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栽培塢竹淸風(재배오죽읍청풍)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 달과 노닐고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한해 남녁관찰사로 일할 적에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정철은 일 년여 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냈다고 술회한다. 이 시는 정철이 남원의 광한루를 크게 증축(1582년 선조 15년)하고, 쓴 시로서 송강은 광한루 연못을 파고 ,세 개의 섬(삼신산, 삼신선도)을 만들어 동쪽의 방장섬에 배롱나무를 중앙의 봉래섬에는 대나무를 서쪽 오작교 옆의 영주섬에는 연정을 세웠고 호수에는 연꽃을 가득 심었다고 한다.


이때가 남원관아의 동기인 자미의 머리를 얹어주었을 때니 "자미"에 대한 사랑으로 방장섬에 자미화를 심지 않았을까한다.


이렇게 송강이 그녀만을 아끼고 사랑하자, 남원 사람들은 그녀를 송강의 이름을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꿈같이 아름다운 세월도 잠시,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전직하게 되자 송강은 자미에게 위와 같은 시를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 뒤 송강과 강아의 애닯고 슬픈 이야기가 계속되지만 본문에서는 줄이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보기 남원포유 기획기사 5499번)


아마 송강선생이 이때 어떤 생각으로 광한루를 조성했을까 하는 것이 당시 사랑에 묻힌 송강의 시를 통해서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광한루 앞 요천 건너편 바위의 아랫 부위엔 “승월대(昇月臺)”란 표기가 있다. 승월대란 말을 풀이하면 달에 오르는 누대라는 뜻이다. 그 전설의 내용은 팔월 한가위 둥근달이 떠오르면 하늘의 선녀들이 광한루원앞 요천변에 내려와 비파를 타며 춤과 노래로 밤새 노니다가. 새벽닭이 울 때 이곳 승월대에서 금빛 달기둥을 타고 달나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다. .


승월대는 요천을 사이에 두고 광한루와 마주하고 있는데 그 위에 수임정(水臨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근래 수임정을 복원하였다. 물을 내려다보는 정자라는 뜻의 이 수임정과 광한루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재현코자 건립한 다리가 승월교 이다.


승월교는 승월대와 천상의 월궁인 청허부를 이어주던 전설의 금빛 달기둥을 상징한다. 선녀들과 요천에서 노니다가 승월대위에서 달기둥을 타고 월궁에 오르듯이 사람들이 승월교를 건너 지상의 월궁인 광한루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해서 광한루의 정문에는 청허부라는 큰 현판이 걸려있다.


위의 내용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과 함께 존재하는 선조들이 남겨준 유산이다. 또한 “승월대(昇月臺)”란 글자가 언제부터 새겨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로를 조성하면서 승월대란 글자부위가 땅속에 묻혔던 것을 지역의 관심있는 문화단체들이 글자가 보이도록 일부의 흙을 파내고. 글자가 확인되도록 도색을 했던 것이다.


예전 강변도로가 조성되지 않던 시절에는 강바닥에서 보면 암벽에 새겨진 글자이지만 제방이 조성되면서 흙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강바닥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요천의 물길이기도 했다.

또한 승월교 아래로 200여m에는 승사교라는 교량이 있다. 이 자리는 승사(昇槎)란 말처럼 뗏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곳이다. 해서 그 자리에 설치한 교량이 승사교라 불린다.



이렇게 요천을 건너면 광한루원이라 불리는 남문(정문)이 나옵니다. 바로 정문에 “청허부(淸虛府)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바로 신선들이 산다는 桂觀(달나라)를 들어 설수가 있다.

광한루원에는 광한루, 완월정, 오작교, 호수속의 삼신산이라 불리는 삼신도, 그리고 월매집 등이 있으며, 춘향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