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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동학혁명 순례벨트

동학의 성지, 남원동학을 알아본다.

[그린경제=가람 기자] 지금부터 118년 전이었던 1894년 갑오년.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동학도와 농민군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왜군과 관군, 민보군의 반격으로 20~30만 명의 무참한 순절자를 뒤로 한 채 역도, 폭도, 비도가 되어 눈보라 휘몰아친 광야와 산야로 내몰리고 숨어 살아야 하게 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막을 내리던 해였다.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도 세월이지만 역도로 몰린 동학도와 농민군, 그리고 그 가족들은 행여나 그 흔적이 남아서 다시 잡혀 갈까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남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자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휘부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싸우다가 살아남으신 유태홍 교구장의 구술을 최병헌 후임 교구장이 기록으로 남긴 「남원군 종리원사 부 동학사」 및 ‘순교약력’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 남원의 참상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연구결과가 전라좌도 농민군의 총 지휘부였던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 당시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단 1년간 시작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 부침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과 변화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는 미흡하기만 하다.

남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회장 황의동)에서는 전라좌도 농민혁명의 실상을 알리고 그 뜻을 모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역군들이 나서서 기념사업을 활성화 시키고 계승 발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하늘같다는 것이 남원동학농민운동기념사업회의 바램이다.

그간 자료수집의 어려움속에서도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유적지 발굴이다. 뜻밖에도 뚜렷한 동선이 일목요연하게(현재 확보된 연구결과) 그려졌고 이는 확실한 벨트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1년에 한 두기씩이라도 표석을 세워 순례 벨트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으로 금년에 이르러 아홉번째인 옛 북문성터인 구남원역사에 표석을 세우게되었다고 한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발굴한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의 순례벨트를 따라가며 어떤 역사적 의의와 자국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교룡산성

교룡산

교룡산은 풍수상 남원의 객산이라 하여 그 역사성과 상징성에 비해 남원인의 의식에서 조금은 소원된 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룡산은 그 위용과 준엄한 모습에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산이면서 특히 그 험준함에 의지한 교룡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된다.

백제인들의 축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교룡산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공을 격파해 황산으로 몰아내 황산대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정유재란 당시 관군은 교룡산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고 했고 모든 군수품과 무기를 옮겨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명나라 장수 양원의 고집으로 애써 수축한 성을 우리 손으로 무너트리고 남원성에서 대적하여 처절한 패배를 당한 만인의총이 만들어지게 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의 주둔지였으며 농민군의 군량, 무기, 화약 등이 이 성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남원성 안의 지휘부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는 농민군이 활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선국사 마루밑에서 승의병장의 인장이 나와 정유재란 때 승군이 주둔했던 것을 입증하 듯 농민혁명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전봉준 장군이 김개남 장군을 설득하기 위하여 약 8일간 남원에 머문 일이 있었는데 그 중 많은 시간을 이 교룡산성과 선국사 안에서 회담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2. 동학의 성지 은적암

교룡산성 안에는 선국사의 암자로 덕밀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선생은 1860년 득도하여 포교를 시작했으나 관아로부터 활동중지 명령을 받고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하려하자 피신하게 되는데 남원으로 잠입한 수운선생은 이 덕밀암으로 들어가(1861)년「은적암(隱跡庵)」이란 현판을 붙이고 피신하면서 경전을 짓고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이는 수운선생이 경상도를 떠나 머문 오직 한 곳이 남원이면서 동경대전의 주요 경전 중 많은 경전들이 이 곳에서 쓰였고 특히 ‘동학론(東學論)’이라고도 하는 ‘논학문(論學文)’도 이 은적암에서 쓴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 수운선생은 서학(西學 : 천주교)과는 달리 ‘東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밝혀 이후 농민혁명도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수운선생은 피신 중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학문과 설법을 듣고 교도가 되었고 선생은 몸소 포교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신변의 위태로움을 느껴 6개월 남짓만에 고향 경주로 돌아가게 되는데(1862년) 이후 얼마지 않아 관아에 체포되어(1863) 사형 당한다.(1864)

수운선생이 은적암에 거처하면서 교룡산에 올라가 검가를 부르고 칼춤을 추면서 심신을 단련하였는데 그 검가는 보존되어 있고 칼춤은 거의 복원단계에 있다고 한다.

동학(천도교)에서는 경전의 대부분이 쓰인 이 은적암을 성지(聖地)로 떠받들고 있는데 암자는 없어졌고 아직 복원하지 못한 상태이며 표지판을 천도교에서 세워두었다. 사적지 안이어서 본 사업회에서 표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후 한국 불교 선구적 개척자이면서 3.1운동의 33인 중 한 분이신 백용성 스님이 최초로 출가한 암자이기도 하며 남원의 산신단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이 산신산에서 채화된 불이 일본 도자기의 상징인 심수관씨에게 전달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3. 통한의 남원성 북문지 구 남원역

구 남원역 부지에 대해서는 해야 할 얘기가 너무나도 많다. 축성시기부터 말썽이 있던 남원성, 그 중에서도 북문은 그야말로 통한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성문인데 이 북문은 구 남원역의 부지 안에 있었다. 이 북문을 헐어내고 일제가 남원역을 만든 것이다.

남원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정유년 남원성 전투인데 다 아는 바와 같이 1만여 명이 순사하고 만인의총을 남긴 전투다. 그런데 이 1만 명의 대부분이 순국한 자리가 북문 근방이었으며 그래서 만인의총의 본 무덤이 남원역 부지 바로 옆인 충렬사에 있었다. 이 한 건만으로도 통한의 북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또 한 차례 패전이 있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라좌도 농민군을 총지휘하던 김개남 장군이 한양 진격을 목표로 떠난 다음에도 남원에는 1만 여명의 농민군이 있었고 이 농민군은 경상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운봉으로 진출해야했는데 이것이 방아치 전투였다. 방아치 전투에서 참패한 농민군은 남원성으로 퇴각하여 주둔하였고 승전한 운봉의 민보군은 남원성을 다시 공격하였다. 이에 다시 패배한 농민군은 마지막으로 남원성을 내주고 도망가야 했는데 이 성문 역시 북문이었다.

11월 28일(음)의 패전이었는데 전라좌도 농민군이 막을 내렸다고 해야 할 최후였다.이 자리에 일제는 성문을 헐어내고 남원역을 만들었는데 이는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얘기는 좀 복잡해서 생략하도록 한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다시 건축하였고 이제 역을 이전하였으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4. 남원부관아 구 남원군청 부지

남원시 하정동 194-1번지 구 군청부지는 호남 제 1의 객사 용성관과 함께 남원시가 보존해야 할 남원부 관아자리다. 이런 연유로 군청이 그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남원의 정치, 행정, 군사, 경제, 법집행이 모두 여기에서 계획되고 집행되었으며 관리, 감독되었다.

이제 시의회 회의실을 비롯한 몇 단체의 사무실만 남고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어 어떤 역사적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춘향전의 절정을 이룬 암행어사 출도와 기생점고, 춘향이 고문 및 매 맞던 자리이기도 하다.

이곳은 군청이 자리를 비우기까지 남원의 심장이어서 어떤 방법으로든 복원되어야 함은 물론 남원의 전반적인 역사가 안내되어야 할 곳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과의 관련은 1894년 6월 김개남 장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라좌도 총지휘부를 이 자리에 꾸렸고 대도회소 및 집강소를 두어 남원은 물론 충청도의 진잠에서 전남의 순천, 광양까지를 장악하고 지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함께 엮은 표석이 세워지려면 이는 본 사업회의 일이 아니라 남원시에서 해야할 일이고 이를 몇 번 협의해 보았으나 아직도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남원의 향교 앞에 진강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이 누각은 남원부 관아의 정문이었다. 관아의 건물을 헐고 새로 지으면서 옮겨 놓은 것인데 아직도 이 진강루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5. 오작교 아래의 서형칠약방

광한루원은 원래 광한루의 누각과 삼신산을 비롯한 연못과 오작교 외에 좁은 부지가 있었을 뿐이다. 이를 확장하고 공원화하기 위하여 주변의 많은 땅을 확보하였는데 남원의 성밖시장도 이때 광한루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남부시장(성안시장은 현 교육문화회관 자리)이라고도 했던 성밖시장은 동학과 농민혁명의 중요한 연고지이다.

옛 시장터에 있었던 호석 현재는 시장터가 광한루확장공사로 광한루 경내로 편입되었다.

우선 1861년 수운선생이 남원으로 잠입해 들어와 최초로 머문 곳이 ‘광한루 오작교 아래 서형칠의 약방’이다. 수운선생이 피신을 하면서 수제자 최자원에게 귀한 약재를 노자로 받아 최중희와 함께 왔는데 약재를 돈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형칠의 생질 공창윤의 집으로 옮겼다가 은적암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수운선생의 교도가 된다.

또한, 농민군이 궤멸한 다음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체포된 농민군들이 사형 당하게 되는데 그 인원이 수 십 명에 달하고 그 대부분이 저자거리에서 참형된다. 이 저자거리 즉 시장이 성밖시장이며 지금의 광한루원 월매집이나 그 인근으로 추정된다.

본 사업회에서는 이를 알리는 표석을 세우려 시도해 보았는데 광한루원이 사적지로 지정되어 문화재 관리국의 허락을 받지 못해 실행하지 못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도 유분수다. 원래의 사적지를 광한루원으로 끌어들인 것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입장객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입장객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알려주면서 볼거리를 보태는 것인데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인근이라 해서 역사적 사실을 묻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