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한성훈 기자] 지난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공동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밀감식팀은 “장준하 선생이 머리를 가격당해 목이 손상돼서 즉사 했고, 이후 누군가 벼랑 밑으로 내던졌거나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비록 민간 발표이나 이로써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사봉에서 실족해 죽었다는 정부의 공식보도를 37년 만에 부정하는 것으로,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진상을 규명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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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 겨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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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
이후 장준하 선생의 유해는 3월 30일 겨레장으로 다시 장례를 치르고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들끓던 여론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평소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사)민족문제연구소 이규봉 운영위원장은 다음 목적지로 장준하 선생이 중국 서주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 길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장준하 선생의 삶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다섯의 동지가 합세해 모두 6명이 장정을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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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자 부인에게 탈출을 암시하고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지원했다. 중국 강소성 서주 쓰카다 부대에 배치 받은 후 중경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7월 7일 동료 3명과 함께 탈출한다. 갖은 고생 끝에 임천에 도착하여 중국 중앙군관학교 산하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하여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했다.
11월 30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등 50여명과 함께 남양과 노하구를 거쳐 새도 넘기 어렵다는 파촉령을 넘어 파동까지 걸어간다. 파동에서는 군함을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1945년 1월 31일 중경에 도착했다. 일행은 시내를 행진하며 임시정부 청사로 간다. 이 사실이 당시 국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강압적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큰 힘을 보탰다.
이규봉 위원장은 대장정의 의미에 대해 말했다. “강소성 서주에서 임천, 남양, 노하구, 파동 그리고 중경에 이르는 구간의 거리가 6천리 가까이 되어 이를 <장준하의 구국장정 육천리>라 한다. 이 구간을 장준하 선생처럼 걷기는 어렵고, 대신 걷는 것에 가장 가까운 자전거로 따라 가면서 장준하 선생의 그 힘들었던 장정을 몸소 되새겨 보고자 한다. 또 이로써 장준하 선생의 삶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하는 생각이다.”
▲ 5동지와 함께 장준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를 떠나는 이규봉 위원장
▲ 2010년 “백범 유적지 순례 자전거 일주”를 떠나는 이규봉 위원장
▲ 지난해 이규봉 위원장의 쿠바 자전거 대장정을 하는 동안 응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규봉 위원장은 지난 2010년에도 국치 100년과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는 1,470km 13빡 14일간의 “백범 유적지 순례 자전거 일주”를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홀로 자전거 순례를 했지만 이번엔 임동순, 전태일, 고병연, 윤일선, 임수현의 다섯의 동지가 함께 한다. 이제 그들의 대장정을 온 겨레가 나서서 크게 손뼉을 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