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미 바른 길을 찾아 오다가
중도변절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행할 수 없다
-김원식이 아들 김성로에세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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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식 선생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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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식 (1888~?) 선생은 누구인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였다.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의 지시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전국 유지들과 연락,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 등 각 군단 대표들이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하는데 협력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동북면군사연락위원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상주하면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난징(南京) 등지로 유학시켰다.
1924년 이후 정의부(正義府)에 투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7년에는 민족 단결과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의 설립에 앞장섰다. 1928년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당시 정의부 대표로 활약하였으나, 뜻이 좌절되자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상해로 가서 당시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곧 상해한인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30년 길림전만선반제동맹대회(吉林全滿鮮反帝同盟大會)의 집행 위원에 피선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동북면군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일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가서 1933년 한국독립당군(韓國獨立黨軍) 대표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 등과 난징에서 회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 활동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