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그렇다면 담징스님은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일본서기 권22》에 보면, 스이코 18년(610) 봄 3월 조에 “高麗王貢上 僧曇徵 法定 曇徵知五經 且能作彩色及紙墨 并造碾磑 蓋造碾磑 始于是時歟 (고구려왕(영양왕)이 승려 담징(曇徵, 돈쵸)과 법정(法定, 호죠)을 보냈다. 담징은 오경(사서오경)에 능통하고 채색(그림)을 잘 했으며 종이와 먹 만드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물레방아와 맷돌을 최초로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담징스님이 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린 주인공이라고 밝힌 사람은 다카야마(高山樗牛1871-1902) 박사로 그는 《쵸규전집 제1권 일본미술사미정고, 樗牛全集,第一巻, 日本美術史未定稿》에서 분명하게 법륭사 벽화는 담징의 작품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채색의 마법사 담징스님이 법륭사에 그린 벽화는 모두 몇 점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당벽화’는 금당 외진(外陣) 흙벽에 그려진 12면을 말하지만 실제로 담징스님의 벽화는 내진소벽(内陣小壁)의 비천(飛天) 벽화 20면과 외진소벽(外陣小壁)의 산중나한도(山中羅漢図)등 18면이 더 있다. 이를 모두 합하면 50면으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1949년 화재로 외진벽 12면이 불에 탔고 나한도를 그린 18면은 화재 후에 벽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산실되어버렸다. 그러나 비천상 등 20면은 일부 떼어내어 별도의 장소에서 보존하고 있어서 화재를 면했다.
▲ 법륭사 금당벽화의 벽화 배치도
외진 벽화에는 1호부터 12호까지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부터 1호벽이며 그 옆이 2호벽으로 시계방향으로 번호를 매겨 나가 동쪽 문 북쪽으로 나있는 벽화가 12호 벽화이다. 벽면의 크기는 가로 폭 225-260 센티의 대형크기와 155센티의 소형벽 두 가지였다. 담징스님이 그린 벽화는 인도의 아잔타석굴 벽화와 중국 돈황 막고굴 벽화와 함께 아시아 고대 불교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 받아 온 작품이었다. 법륭사 금당벽화에 대해 미술사학자인 도쿄대학의 다키(滝精一) 교수는 사방사불(四方四仏)로 설명하고 있으나 후쿠이(福井利吉郎)씨 등은 석가·아미타·미륵·약사여래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로 보고 있다.
금당 외진(外陣)의 12점 그림을 살펴보면, 제1호 벽화 ‘석가정토도, 제2호 ‘보살반가상’ 제3호 ‘관음보살상’ 제4호 ‘세지(勢至菩薩)보살상’ 제5호 ‘보살반가상’ 제6호 ‘아미타정토도’ 제7호 ‘관음보살상’ 제8호 ‘문수보살상’ 제9호 ‘미륵정토도’ 제10호 ‘약사정토도’ 제11호 ‘보현보살상’ 제12호 ‘십일면관음보살상’등으로 이뤄져 있다.
▲채색의 마술사 고구려 담징 스님이 그린 6호 벽화(소실되기 전 모습)
이런 소중한 금당에 화재가 발생 한 것은 1949년 1월 26일 새벽의 일이었다. 금당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벽화 모사 화가가 사용하고 있던 전기 이불방석이 발화점이라는 설과 형광등용 전열기기의 누전 그리고 누군가에 의한 방화설이 있으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일부 손상된 벽화는 아크릴수지와 요소수지를 주입하여 경화시킨 후 1954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복원하여 법륭사 안 수장고(収蔵庫)를 지어 복원해두고 있다. 그러나 보존상의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불탄 금당은 1954년 완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법륭사 금당 화재를 계기로 서둘러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여 1950년 8월 29일부터 엄격한 관리를 하고 있다.
![]() |
||
▲ 국보 백제관음보살입상 |
법륭사에는 담징스님의 벽화 말고도 꼭 보아야 할 불상이 있는데 늘씬한 형상의 백제관음상이 그것이다. 백제목조관음보살입상으로 국보에 등록된 이 불상은 높이 210.9cm로 7세기 전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조각작품으로 전 세계에 소개되고 있는 불상이다. 법륭사는 이 불상을 특별히 보존하기 위해 1998년 법륭사 안에 대보장원(大宝蔵院)을 지어 백제관음상을 안치해놓고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 불상은 대영박물관에도 있는데 그것은 이 불상을 본뜬 모조작품이다.
1997년에 일본과 프랑스의 국보 교환전시가 개최되었는데 일본측은 법륭사의 ‘백제관음상’을 프랑스 측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각각 대표작으로 뽑았다. 법륭사의 백제관음상은 일본을 대표하는 불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정도로 세계적으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불상이다.
또 하나 눈여겨 볼 작품은 백제출신 구라츠쿠리노도리(鞍作止利)가 만든 석가삼존불상이다. 도리법사로 통하는 나라시대에 활약한 불상조각가로 그의 작품은 법륭사의 금당본존동조석가삼존상(金堂本尊銅造釈迦三尊像, 623년)과 아스카사(飛鳥寺)의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釈迦如来坐像, 일명 아스카대불)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특히 도리식(止利式)이라고 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인데 후세의 일본의 불상과는 다른 대륙풍의 작품으로 일본불교조각사에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리법사의 석가삼존상(釈迦三尊像)을 보고 《일본천황도래사 -일본천황은 한국에서 왔다-》를 쓴 와타나베 미츠토시(渡邊光敏) 씨는 그의 책에서 “백제인 도리 씨가 만든 아스카대불이나 법륭사 여래상 양식을 보면 동그랗고 반짝 뜬눈과 네모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충남) 서산의 얼굴 마애불을 닮았고 걸친 옷 무늬는 (부여) 군수리 폐사에서 출토된 석가여래상과 같다.” 면서 법륭사 불상의 원조가 백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 |
||
▲ 니이로츄노스케의 모형 백제관음상(동경박물관) |
★ 찾아 가는 길★
<법륭사>
*주소: 奈良県生駒郡斑鳩町法隆寺山内1-1(法隆寺, 호류지)
*가는 길: 오사카에서 가는 경우는 오사카 난바(難波)에서 야마토지센(大和路線)을 타고 호류지역(法隆寺驛)에서 내려 나라교통버스(72번계통)를 타면 법륭사 바로 앞에서 내린다.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직접 가는 경우는 간사이공항 안내에서 친절한 한국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