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일본이 변하고 있다. 아니 우에노공원이 변했다. 기분 좋은 변화다. 어제 찾은 우에노공원의 변화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유쾌하고 기쁜 변화였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3년 전 기자는 우에노공원 안에 있는 왕인박사 기념비를 찾아보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제목은 “왕인박사 기념비, 내선일체에 이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던 것은 “왕인박사 기념비 앞에 작은 한글 안내 팻말이라도 세워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기자는 어제 3년 만에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 강연차 도쿄를 방문하여 함께 온 일행들과 공원을 방문해보았다. 시커멓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없이 서있던 왕인박사 기념비는 방금 목욕을 한 듯 깨끗한 모습이었고 그 앞에는 한글을 곁들인 깔끔하고 예쁜 모습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함께했던 일행들은 왕인박사안내판에 모두 감동했다.
▲ 한글을 곁들인 왕인박사 기념비를 함께 방문한 이무성화백의 그림
안내판에는 한글로 “<고사기>등 사서의 의하면 왕인박사는 백제에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래한 학자로서 왕인박사비는 왕인박사헌창회가 1940년과 1941년에 건립하였습니다.” 라는 한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우에노공원에 왜 왕인박사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걸까?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이 공식명칭인 이곳은 1874년 명치 정부 때 세운 일본 최초의 공원이다. 온시공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궁내청 소속의 땅을 도쿄시에 하사(恩賜, 온시는 일본 발음)한데서 유래한다. 공원 내에는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유명한 동물원, 미술관은 물론이고 교토 청수사를 본떠 만들었다는 청수관음당과 몇 개의 신사, 명치유신의 지도자 사이고(西郷隆盛) 동상과 야구장 심지어는 시노바즈(不忍池) 보트장까지 있어 공원 구경만도 하루해가 모자랄 만큼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언제나 찾아드는 시민들로 붐비는 곳이다.
▲ 새로 만들어 세운 왕인박사 안내판에 한글이 곁들여 있다
우에노공원에 왕인박사 기념비를 세운 이들을 알기 위해서《도쿄 속의 조선, 東京の中の朝鮮, 高柳俊南, 明石書店, 1996》에 소개된 왕인박사 기념비에 대한 유래를 소개한다.
“우에노공원 사이고다카모리 동상에서 오십여 미터 거리 안쪽에 <왕인비>가 있습니다. 왕인은 4세기 말에 백제에서 도래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로 처음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도래(渡來)씨 계족인 서문(西文)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1939년 일입니다. 태평양 전쟁 직전의 이 시기에 왜 이와 같은 고대의 전설적인 인물비가 세워진 것일까요? 당시 중국침략 수행을 위해 식민지였던 조선을 철저히 이용하려고 한 일본 정부는 <내선일체> 곧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조선문화를 철저히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일본에 <귀화>한 것을 <내선일체>의 구실로 삼았습니다. 왕인은 그 상징적인 인물로 이용된 것이지요.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이 비가 세워졌던 것은 이 비의 뒷면에 발기인 중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지로(南次郞.1874 ~1955)를 비롯한 일본의 조선 침략 중심인물이 몇 명인가 포함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해서 우에노공원에 왕인박사 기념비가 세워진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인데 이 책을 쓴 사람들은 일본인이다. 이들은 "도쿄 재일한국·조선인학생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임”이란 다소 긴 이름의 단체 회원으로 도쿄도립고등학교 교사인 아라이(新井精) 씨를 비롯하여 14명이 각 분야를 나눠 이 책을 만들었다. 우에노공원의 왕인박사 비가 “내선일체 도구”로 세워졌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란 극우화 되어 가는 일본사회에서 몰매 맞을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용기있는 일이지만 아쉬운 것은 왕인박사를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 우에노공원의 왕인박사 기념비
이른바 친한(親韓) 인사들의 한계를 여기서도 보게 되어 다소 씁쓸한데 다만 이들의 활동은 일본의 양심임이 분명하다. 이 책에서는 기념비가 세워진 것을 1939년이라고 했는데 실제 우에노공원에 세워진 것은 공원관리소에 확인 한 결과 소화 15년(1940)과 소화 16년(1941)에 세워졌으며 상륜부가 있는 비문이 먼저 세워졌고 그 옆에 것이 나중에 세워졌다고 했다. 1939년이라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하던 상황에서 전쟁야욕에 광분하던 시대이며 미나미(南次郞) 총독은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전쟁의 흔적을 돌에 새기느라 여념이 없던 인물이다.
1939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기념해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인왕산 암벽에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도 미나미 총독이라고 이순우 씨는《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에서 밝혔다.
무엇이든 돌에 새기면 영원히 남는다. 그러나 영원히 남는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미나미와 일본 제국주의는 백제 왕인박사마저 <내선일체>의 도구로 이용했으며 70여 년간이나 우에노공원의 침침한 나무 숲 사이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간 동안 왕인박사를 외롭게 서 계시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이 돌에 새긴 왕인박사 기념비는 일본 제국주의의 흉악함을 오히려 드러낼 뿐이다. “기념은 하되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졌거나 억지 춘향인 것은 비단 왕인 박사 기념비만이 아니다.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수많은 조선인의 영혼 역시 하기 좋은 말로 “제사”를 모시는 것일 뿐 실상은 “합사”를 반대하고 하루속히 고국의 품으로 돌려주기를 바라는 우리 쪽 유족의 뜻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3년 전 이곳을 찾아 “왕인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방치된 것이 안타까워 시라카와(白川芳子)라고 이름을 밝힌 우에노공원 관리사무소 여직원에게 “이곳에 한글 안내판을 세워달라”고 부탁한 것을 잊지 않고 그 뜻이 전해졌고 그리고 안내판을 세워준 공원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글이 곁들여진 안내판을 뒤로하고 나오는 우에노공원의 3월 하늘은 유난히 더욱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