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本意)라.
- 대한독립군 유고문(諭告文), 1919년 12월
제6회 독립정신 답사단원으로 연을 맺은 지도 어느덧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하다가도 새롭게 접하는 모든 것들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대학생이 촌음을 다투어가며 오늘 하루를 별탈없이 보내는 것이 마냥 다행으로 느껴지는 샐러리맨이 되었으니, ‘Time flies!’라는 감탄사로 절로 나오는 요즘입니다. 직업적 특성상 하루에도 울다가 웃을 일이 너무 많아 가끔은 피곤하기도 한 주식 시장을 잠시 뒤로 하고, 답사단원으로 활동하며 접할 수 있었던 호국선열 한 분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담아 몇자 적어봅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년 시절은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펼치고 살아가기에는 조금은 가혹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강화도 조약(1876년)과 임오군란(1882년)은 당시 이 땅이 앓고 있던 내외의 혼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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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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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듯 장군의 유년기는 지금의 또래들과는 달리, 생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가득했습니다. 군인, 머슴, 제지공장 노동자에 이어 승려의 생활까지 실로 많은 일을 겪어야 했던 홍범도 장군.
특히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 알려진 지담대사와 함께 하며 호국선열의 공적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1년 반 남짓한 시간은, 장군으로 하여금 열강의 위협과 부조리한 억압으로부터 겨레의 권익과 안녕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파계 후 솜씨 좋은 포수로 살아가던 장군에게, 일제가 시행한 총포화약류 단속법은 생존권을 침해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정미의병(1907)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항일 활동에 뛰어 들게 된 장군께서는, "조선의 독립은 오로지 무장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무오년 독립선언서(1918년)의 굳은 의지를 행동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대한독립군 창설과 함께 총사령관으로 취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기억은 장군의 일생을 가장 밝게 빛내는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작은 고을의 포수에서 항일투쟁을 이끄는 지도자까지 이어져 온 장군의 일생은 점→선→면으로 넓어지는 도화지의 먹물과도 같이 신중하고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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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거리-크즐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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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市)에서 일어난 일련의 갈등에 이어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항일 활동의 집적도가 떨어진 점은 두고두고 아쉽기만 합니다. 또한 항일 투쟁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장군의 유해가 아직도 이역만리 크즐오르다에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만 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일생을 보면 만화가 Bob Kane의 위대한 영웅이자 결코 환영받지 못한 비운의 사나이 배트맨이 떠오릅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며 극한의 시련을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과, 온갖 고통의 근원인 병든 사회에 맞서 진력을 다해 싸웠던 젊은 시절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치기 때문입니다. 만화 속의 억만장자 브루스웨인이 악(惡)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바탕으로 범죄로 얼룩진 고담시를 수호하기 위해 검은 마스크를 쓴 것처럼, 홍범도 장군 역시 당신이 겪어야 했던 불우한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냥총을 들고 우리땅 곳곳을 누빈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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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묘역_크즐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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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TV에서 호국선열의 공적을 기리는 짤막한 광고가 전파를 타면서 홍범도장군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절박한 마음으로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시대와 사람을 발전시키는 정도(正道)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의 자세로 소중한 우리땅을 아름답게 일구어 나가겠다고 다시금 다짐하게 해주신 홍범도 장군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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