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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국궁의 살꽂이솔[과녁] 모습

국궁 살꽂이[과녁-貫革-的] 솔의 근원에 대한 검토 1

[한국문화신문 = 진용옥 명예교수]  국궁에는 활과 화살 그리고 살꽂이 솔[과녁]이 있다. 활은 손으로 쥐는 줌통을 시작으로 커브를 트는 오금, 활시위를 올리는 부분 고자가 있다. 발사 직전까지 화살을 올려 두는 출전피가 붙은 쪽이 윗장, 아랫쪽이 아랫장이다. 활시위 중앙에 화살을 매기는 부분을 절피라 한다.이에 대한 각의 명칭과 구조는 아래 그림과 같다.


   
▲ 그림 출처- 웬하키피디아

살꽂이란 솔 또는 과녁을 말한다. 표적[]에다 가죽[]을 붙여 관통[貫通] 하기를 바랬으니 관혁[貫革]이라 했고 독음은 과녁이다. 우리 문헌 자료에서 관혁(貫革)’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왜어유해(1781~1782, :40b)에서이다. 유성음인 과 모음 사이에 있는 이 탈락하면서 만들어진 과녁19세기 무렵에 나타나서 현대에 이르는데 우리 사전에서는 이미 어원 의식을 상실한 말로 보고 관혁(貫革)’을 이 말의 원래 말로 처리한 것 이외에 별도의 관련을 맺어 주지 않았다.

16세기에는 관혁(貫革)’의 의미를 갖는 고유어로 이 있었다. 관적(貫的 사적(射的) 표적(標的) 등이 비슷하게 쓰인다. 이때 관의 중앙을 관중, 적의 중앙을 적중이라 하며 모두 정확하게 밎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곡[正鵠]이란 살곶이 중앙의 4각형 표적을 말한다. 이와 같은 관용어가 있는 터에 굳이 살꽂이이란 토박이 말을 내세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황은 인류 보편적 도구요 무기였다. 세계 도처에 널부러져 있지만 특히 동원동이[]족이 활 잘 쏘는데서 유래했고 말한다. ‘자를 파자하면 대궁이란 뜻이라고 말 하지만 사실 어떤 문헌자료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그러나 동원동이족이 활에 대해서는 중원 화하족을 앞선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고조선에서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는 단궁은 고시( -가시나무화살) 함께 중원으로 수출하였으며 .고구려에서 쇠뿔이나 양뿔로 만든 맥궁(貊弓)이 개발되고 단궁시대가 마감됐다.(무용총 벽화) 이후 각궁(角弓)과 철궁(鐵弓) 등을 개발하면서 동원동이족은 중원 화하족을 능가하는 활솜씨를 구사한하다 고구려 시조 추모[朱蒙]는 명사수였으며 태조 이성계 모두 활을 잘 쏘는 명사수였다.

그러므로 활에 대해서는 중원보다는 동원동이에 기준에 의하여 기술되어야 한다. 관혁[貫革-과녁], 정곡[正鵠] 따위가 모두 중원 기준의 용어인데 4각의 정곡은. 땅은 네모지다라는 중원의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본다. 이에 비해 동원동이족은 둥근하늘과 태양을 우선시 한다. 표적[정곡]이 둥근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둥근 표적은 동원동이족의 살꽂이요 사각 정곡은 중원쪽의 쌀곶이를 상징한다고 본다.

 

살꽂이 솔 화살이 꽂히는 과녁

살꽂이란 말은 화살이 꽂히는 곳 또는 물건이라 뜻이다. 이 말은 살꽂이 다리[‘箭串橋’]에서 근거하여 글쓴이가 처음 쓴 말이다. 살꽂이다리는 성동구 성수1가 동에서 한양대학을 가는 중랑천 하류에 걸려 있는 돌다리이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세운 후에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太宗]이 때문에 몹시 속을 끓였다.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등극했기 때문이다.

태조는 옥새(玉璽)를 가지고 고향 함흥으로 가버렸다. 방원(태종)은 여러 차사를 보냈으나 모두 함흥차사(咸興差使)가 되었다. 그러나 새끼 딸린 어미 말을 몰고 간 이성계의 막역한 친구 하륜의 지혜로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방원은 지금의 살꽂이다리에서 아버지 태조를 맞게 되었다.

하륜은 방원에게 다리 중간에 차일(遮日)을 치되 가운데 받침목을 아주 굵은 나무로 하고 항상 그 나무 기둥에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하라고 일렀다. 과연 하륜의 예측대로 이성계는 활로 쏘았다. 그러나 방원은 일러 준대로 기둥에 몸을 숨겨 화살을 피했다. 화살은 차일의 기둥에 깊이 꽂히고 말았다. 이 일로 사람들은 이 다리를 화살이 꽂힌 다리라 하여 살꽂이다리라 했다고 전한다. 지금 보물 .17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출처-성동구청 고적 알림판

물론 전설이고 또 태종때 다리가 건설되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다리가 없다해도 평지에 군막을 지고 맞을 수도 있으며 차일과 굵을 기둥은 과녁이나 표적을 상정하기에 적합한 일화이다. 대 사례때 차일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살꽂이 솔은 화살이 꽂이는 과녁이란 뜻이 되겠다.  

국궁과 양궁의 살꽂이 솔은 아래 그림과 같다 천으로 만든 살꽂이를 솔포라 했으니[조선의 궁술 1933] 판으로 만든 솔은 솔판이 되겠다. 양궁은 5륜기를 상징하듯 5방색 원형 표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적의 중앙은 노랑색이다 이에 비해 국궁의 솔은 1자 눈썹 밑에 4각의 정곡흑관이 있으며 중앙에는 붉은색 홍심[紅的丹心]표적이 있다. 과녁과 표적이 혼성된 모습이다.  

이에 비해 대한국궁문화혐회애서는 사각 과녁을 3등분하고 이를 정곡관(正鵠貫) 이라 부른다. 이는 주례에 근거한 과녁으로 동원동이의 기준보다는 주례 천관 사구편[周禮天官射毬]에 근거한 규격과 구조를 기준한 것이며 조선궁술의 과녁을 기준으로 재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중원의 기준이지 동원의 기준과는 멀어져 보인다. 그러나 이 솔판이 말타고 활쏘는 기파 에서 국제규격의 움짐임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공인 국궁 살꽂이는 왜 이러한 모습으로 진화 했을까? 그 유래는 분명치 않다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일장기를 그려 놓고 쏘았으며 일시 동인[一視同人]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동[]자를 파자하여 그렸다고 전 한다. 그럴듯 한 이야기 이지만 일부의 중언에 의할 뿐 근거가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궁술이 그런 적개심을 기르는 거도 아니고 마음을 다스리는 심신 수련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지금의 국궁 살꽂이 솔은 광복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가장 확실한 자료는 1928년 제 12조선 궁술대회에 나타난 정곡 과녁이다. 이 시기는 소위 삼일운동 이후 무단 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고 전통 문화가 해금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정곡과녁만 나타나고 1자 눈섭은 나타나지 않으며 홍적단심도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1933년의 저술 조선궁술에 나타난 구도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구도는 어디에서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선 문헌과 도상학적으로 그 근원을 추적해 본다.


고구려 고분 벽회의 살꽂이 살

살꽂이에대한 실마리는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의 기마사희도[騎馬斜戲圖]와 춤 무덤[舞踊塚]의 사냥그림이다. 살꽂이 솔의 관점에서만 보면 사냥그림은 미후 [순록과녁]의 원형이며 사희도는 기사표적의 원점이다. 4각형의 표적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 미후과녁과 기사과녁의 원점 원형

세종실록 131 오례(五禮)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의 살꽂이 솔

세종실록에는.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장전의 안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훈련관(訓鍊觀)에서 보사(步射)의 후(-과녁)를 설치하고란 기록이 보인다. 이어서 . 보사[步射]에서 원후, 중후, 근후의 세 종류 살받이 솔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원후(遠候)

사단(射壇)에서 떨어지기가 2 40()이다. 청색포(靑色布)로써 바탕을 하여, 높이와 나비가 1() 8()이고, 그 나비를 3등분(等分)하여, 정곡(正鵠)이 그 1등분을 차지하는데, 정곡은 사방이 6()이다. 흰색을 칠한 가죽으로써 이를 만들어 후()의 복판에 붙이고, 돼지[] 머리를 그린다. ()의 좌우(左右)로는 서로 떨어지기가 50()로 하여 기()를 세워 표적(標的)을 삼고, ()의 뒤로는 50()로 하며, 좌우(左右)로는 서로 떨어지기가 70()로 하여 기()를 세워 표적(標的)을 삼는다. 〈화살이〉 먼 데 이른 것과 복판에 맞힌 것과 〈후()에〉 미친 것을 취한다.

중후(中候)

 사단에서 떨어지기가 1 80보이고, 또한 청색포로써 바탕을 하여, 높이와 나비가 1 4척이고, 정곡(正鵠)은 사방이 4 6촌이 넘는다.

근후(近候)

사단에서 떨어지기가 80보이고, 흰색을 칠한 가죽으로써 바탕을 하여, 높이와 나비가 4 6촌이다. 모두 돼지 머리를 그리는데, 〈화살이〉 복판에 맞힌 것을 취한다. 이에 대한 구조와 거리를 구분하면 그리면 아래와 같다.(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