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는 봉래 양사언의 유명한 시로 유달리 금강산을 사랑했던 양사언(1517~1584)은 호를 봉래(蓬萊)로 지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조선 명종 때 문신으로 시조와 서예가로도 이름이 났는데 한석봉과 김정희, 양사언을 가리켜 조선의 세 명필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의 백성 사랑 또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양사언은 비상한 천재인데다가 노력을 거듭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전해질 만큼 학구파였습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40년간 다스린 고을이 8군데나 되었지만 청렴결백하기로도 유명하지요.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에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고을은 바로 옛적 예맥(穢貊)의 한 작은 고을입니다. 주민들은 모두 암굴에서 짐승처럼 거처하는 섶을 묶어 입구를 가리며 비탈밭을 경작하여 근근이 수확하면서 구차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운데 줄임) 백성은 귀신같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했고 옷은 해져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애처로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라는 《명종실록》 27권 16년(1561) 2월 17일 기록은 양사언의 백성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한석봉,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명필인 양사언의 초서(문화재청 제공)
양사언은 특히 초서명필로 유명한데 서강대학교도서관에는 보물 제1624호 양사언 초서(楊士彦 草書) 한 축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양사언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6)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초서 명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금강산과 같은 선경(仙境)을 좋아하고 세속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듯이 글씨에서도 당나라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의 제멋대로 거리낌 없는 초서를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초서를 잘 쓴다 해서 초성(草聖)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양사언이 죽자 손곡 선생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습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인 줄 본래 알았으니 / 슬퍼하며 부질없이 수건을 적실 필요가 없네 / 그대 동녘 바다의 봉래로 돌아가는 길에는 / 벽도화 수천 그루가 활짝 핀 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