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2년 9개월 뒤인 1446년(세종 28년) 9월에 한글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훈민정음》은 한자로 된 목판본으로, 1책 33장으로 이루어졌다. 앞 4장은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글 정음편(예의편)이고, 뒤 26장은 집현전 학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가 함께 지은 정음해례편이다. 마지막 3장은 정인지가 대표로 서문을 지었다. 정음편은 ‘세종대왕의 서문’과 ‘예의’로, 정음해례편은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와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인지는 서문에서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해례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면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하며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이나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쓸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King Sejong Promulgates Hangeul to the People King Sejong, 2 years and 9 months after the creation of the Hunminje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정부가 경복궁 광화문에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을 달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1월 20일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광화문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 설치 추진 계획을 보고했고, 국가유산청장이 이에 적극 동의했다는 것이다. 한글 단체와 관련 전문가들은 이를 "역사적 결단"이라며 크게 환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현판 교체를 넘어,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중대한 사건이다. 이상적인 1안: 한글 현판으로만 한글 단체와 많은 국민이 가장 많이 염원하는 바는 단연코 '1안'이다. 곧, 현재의 한자 현판을 내리고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만 거는 것이다. 광화문은 단순한 고궁의 정문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지이자, 한국 문화의 발신지로서 세계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에 한글이 태어난 조선 정궁(正宮)의 정문으로서 훈민정음체 한글 현판이 걸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자가 대한민국의 얼굴인 광화문에 오롯이 걸릴 때, 비로소 우리의 정체성이 온전히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 난관과 2안의 값어치 그러나 현실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두 달이 지난 1444년(세종 26년) 2월에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한글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한글 창제는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학문에 정진하는 데 한글이 손해를 끼치며, 억울한 죄인이 생기는 것은 죄인을 다루는 관리들이 공정하지 못한 탓이지 죄인들이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세종대왕은 중국의 것을 따를 것은 따르되 우리의 것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말했고,, 한글 창제는 학문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쓰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세종대왕은 신하들을 설득해 더욱더 철저하게 한글 반포를 준비했다. The Officials Petition Against Hangeul Two months after King Sejong the Great created Hangeul, in February 1444 (the 26th year of Sejong’s reign), an incident occurred where officials, including Choi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지난해 우리 곁을 떠나신 이무성 화백님은 참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대도레코드사에서 우리 대중음악 발전에 이바지하시다가, 은퇴 뒤 <우리문화신문>을 통해 붓을 드시고 그 붓끝으로 한글의 역사와 한국문화,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를 되살려내셨습니다. 특히 2015년 광화문 《한글창제 28사건》 전시, 2019년 《한글을 빛낸 여성 19인》 전시, 2020년 서울도서관 외벽을 수놓은 《훈민정음 해례본 이야기》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한글의 역사를 그림으로 풀어내신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이무성 화백님은 한글 역사의 완성판 《그림으로 보는 한글 역사 28》 끝내놓고도 빛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셨습니다. 올해는 한글 반포 580돌, 한글날 제정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화백님께서 평생 빛내고자 하셨던 한글의 역사를 기리는 이 특별한 해에, <우리문화신문>은 김슬옹ㆍ김응의 글과 함께 화백님의 유작 《그림으로 보는 한글 역사 28》을 추모 연재로 선보입니다. (편집자 말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은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에,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한국 대중음악사의 거목이자 민족문화의 수호자이셨던 이무성 화백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1972년 새마을노래 제작을 총괄하시며 1,000여 작품의 음반을 기획하신 음악계의 거장이셨습니다. 특히 김민기 선생의 ‘아침이슬’ 음반을 기획하여 한국 민중가요의 새 지평을 여신 분이기도 합니다. 대도레코드사 전무이사로 35년 동안 재직하시며 한국 대중음악 발전에 헌신하셨고,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한국음반산업협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시며 음악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음악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탁월한 화백으로서, 평생을 한국화와 역사 기록화를 그리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셨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한국문화와 한글,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 그림을 그리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문화신문>과의 특별한 인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07년 2월 16일 첫 작품을 시작으로 2025년까지 무려 700여 편의 작품을 <우리문화신문>에 올리시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이무성 화백님과 이윤옥 시인이 함께 여신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은 <우리문화신문>이 서울 중구청 등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는 오늘, 온 겨레 아니 평화를 꿈꾸는 전 세계인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며 밤잠을 설레듯 밤잠을 제대로 못자고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철도고 1학년 때부터 한글운동, 말 운동을 해오며 남북통일, 언어 문제를 연구해 온 남녘의 한글학자이자 훈민정음학, 세종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슬옹입니다. 슬기롭고 옹골찬 저의 꿈이자 우리 겨레의 큰 꿈을 위해 감히 한 가지 청원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었으니 해야 될 일이, 서둘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다급한 일이 많겠지만 북남(남북) 연합 '정음청(언문청)'을 먼저 설립해 주십시오. 통일이 되면 언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지금도 겨레말큰사전으로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가 정음청을 제안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훈민정음이야말로 남북을 하나로 잇는 가장 강력한 끈이라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에 담긴 인류 보편의 평등사상과 소통정신이야말로 새로운 통일시대 소통의 이념이 될 것입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언어학자 세종 이도는 누구나 쉽게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 인사동은 전통문화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인사동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인사동 들머리(안국동 쪽)에 있습니다. 커다란 붓이 먹물을 묻혀 동그란 획을 긋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조형물은 2007년 서울디자인재단의 “서울시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의 하나로 인사동 상징물 지명공모 당선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붓대에 한글은 전혀 없이 한자로 “大韓民國傳統文化藝術中心仁寺洞”이라고 새겨놓은 것입니다. 인사동이 중국 거리도 아니고 저렇게 해놓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조형물을 만들고, 심사위원들은 그걸 당선작으로 뽑았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중국 관광객이 더 많이 올 거라고 착각하신 건가요? 서울시장에게 항의전화라도 해야할 모양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의정부에 있는 ‘신숙주 선생묘’에 가면 1971년에 한글학회에서 세운 ‘문충공고령신숙주선생한글창제사적비’가 있다. 보한재 선생이 나신 554돌을 맞이하여 당시 한글학회 허웅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앞장서서 세운 사적비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요 관리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 《운회 번역》,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직해동자습》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그의 이름만이 빠짐없이 올라간 것만 보아도 그 업적을 가늠해 볼 수 있다(표1 참조). 그렇다면 한글 혜택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세종의 뜻을 이어 남긴 그의 큰 한글 업적을 기려야 할 책무가 있다. 사실 한글창제사적비는 한글학회가 아니라 한글을 쓰는 남북한 온 겨레가 세워야 할 사적비였다. 그런데도 우리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세조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고 있다. 사육신, 생육신의 삶은 고결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세조 편에 선 것을 단순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있는 주시경 마당에서 가까운 곳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세운 조선어학회 곧지금의 한글학회(회장 권재일, 이사장 김종택)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원래 3호선 안국역 근처에 있었는데 광복 뒤 이곳으로 이사 왔다. 원래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이신 애산 이인 선생이 많은 돈을 기증하고 국민 모금과 정부 후원으로 1977년에 지금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학회 앞에는 주시경 선생의 가슴상과 이 학회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얼말글 새김돌이 학회의 뿌리와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한글학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한글을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이 세운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이기도 하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지금의 연세대 옆 안산에 자리 잡고 있는 봉원사에 모여 우리 말글 연구를 통해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자고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글학회의 뿌리다. 무려 100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학회로 봉원사에 가면 그것을 기념하는 새김돌을 세워놓았다. 안타깝게도 주시경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도봉구 방학로 17길 46호 132-854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 장소 서울 창동역에서 우이동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채 10분도 안 돼 방학로 쪽으로 들어서면 ‘연산군 묘’라는 교통표지판 글씨가 보인다. 바로 방학로 17길 옆 야산에 조선시대 10대왕으로 가장 포악했던 비운의 임금, 한글 탄압의 악명을 떨친 연산군 무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세종대왕의 한글 연구를 도왔던 한글 공로자인 정의공주 무덤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어 한 지역에 한글 공로자와 탄압자가 같이 있는 셈이다.또한 도봉구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일제 말기에 기적적으로 소장하여 고이 보관해 온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무덤이 있는 야산 옆은 원당 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비운의 왕, 포악스런 왕의 무덤이라 그런지 무덤 자체는 쓸쓸해 보인다.왕족의 무덤은 크게 능과 원과 묘로 구분한다.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며 원은 세자, 세지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가리킨다.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데 연산군은 쫓겨난 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