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4. 분청사기의 상감기법, 덤벙기법, 투각기법 이야기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분청사기는 백자와 청자에 백토로 칠해 다시 구워 낸 것으로, 회청색 또는 회황색을 띠는 도자기입니다. 이 분청사기를 만드는 기법은 가장 흔한 상감기법(象嵌技法)을 비롯해서 투각기법(透刻技法), 덤벙기법, 인화기법(印畵技法), 박지기법(剝地技法), 철화기법(鐵畵技法), 귀얄기법, 조화기법(造花技法) 따위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상감기법은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판 후 백토나 자토(裏土, 붉은 흙)를 집어넣어 무늬를 나타낸 것입니다. 또 투각기법은 도자기를 이중으로 만들어 안과 밖으로 붙인 다음 바깥부분을 무늬에 맞게 구멍을 내어 안쪽의 도자기를 볼 수 있게 만드는 기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덤벙기법은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내는 것이지요. 여기서 “덤벙”이란 말은 “크고 무거운 물건이 물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소리” 곧 의성어인데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1523. 중국 것이 아닌 우리만의 의학을 추구한 향약집성방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는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민간의 옛 늙은이가 한 가지 약초로 한 병을 치료하여 신통한 효력을 보는 것은, 그 땅의 성질에 적당한 약과 병이 서로 맞아서 그런 것 아닐까?” 위는 세종 때 발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서문의 말입니다. 어떤 이는 한의학이 중국 중의학을 표절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람의 몸과 그 사람이 태어난 고장의 흙은 하나라는 뜻의 '신토불이(身土不二)'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아무리 중의학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이 우리 겨레에게 잘 맞을 리가 없기에 우리만의 의학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서문은 가르쳐줍니다. 이는 중국 사람과 조선 사람은 소리와 기운이 달라서 말과 문자가 다르다며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과 같은 정신입니다.
1522. 우리 겨레의 혼인, “장가든다”였다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해온 전통혼례를 보면 신랑이 자신의 집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곳에서 머물러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든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도 그런 전통의 하나입니다. 율곡 이이를 낳은 조선 중기의 예술가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남편도 혼인한 뒤 한동안 강릉 처가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려말 관(冠)·혼(婚)·상(喪)·제(祭) 곧 사례(四禮)에 관한 규정을 담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들어오면서 주자가례 규정대로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른 다음 바로 신부를 데려오는 것으로 바뀝니다. “장가간다”에서 “시집간다”로 바뀐 것이죠. 대신 주자가례대로 처가에서 전안례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혼례예식은 모두 처가에서 치르는 “반친영(半親迎)”으로 정착되었습니다.
1521.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독도) “1695년(숙종 21) 여름에 용복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떠돌이 중 5인과 사공(沙工) 4인과 배를 타고 다시 울릉도에 이르니 (중략)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왜선이 마침 당도하였다. 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왜인들이 “우리는 송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고 물러갔다. 용복이, ‘송도도 원래 우리 우산도’라 하며 우산도로 달려가니…” 위 글은 조선후기 학자 이익(李瀷)이 1740년경에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중 "천지문"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글에서는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이며, 송도도 우리의 땅"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또 글에서는 왜인들이 이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 지금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우기는 것은 뻔뻔합니다.
1520. 조선 후기의 피부관리법, 도화면과 면지법 180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펴낸 여성백과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보면 피부관리라 볼 수 있는 도화면(逃花面)과 면지법(面脂法)이란 것이 있습니다. 먼저 도화면은 “북제(北濟) 노사침의 아내 최씨가 봄날 복사꽃을 흰 눈(雪)에 섞어 아이들 얼굴을 씻기면 빛이 나고 윤기가 있으며, 홍화(紅花)를 따다가 얼굴을 씻기면 고와진다고 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면지법'을 보면 “겨울에 얼굴이 거칠고 터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봉하여 4~7일쯤 두었다가 얼굴에 바르면 트지 않을뿐더러 윤이 나고 옥 같아진다. 얼굴과 손이 터 피가 나면 돼지기름에 괴화(傀花) 곧 회화나무 꽃봉오리를 섞어 붙이면 낫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의 아스트린젠트와 비슷하며 “괴화 콜라겐 자외선차단 영양크림”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1519. 고추, 일본에서 전래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통식품 고추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김치와 고추장 등 고추를 이용한 우리의 전통식품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한국식품연구원은 고문헌 등을 분석한 결과 임진왜란 훨씬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고추가 있었다는 자료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100년 전인 1489년에 간행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에 고추를 뜻하는 ‘초(椒)’자와 고추의 옛 한글 표기인 ‘고쵸’가 적혀 있으며,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고쵸 초(椒)’가 표기돼 있다는 것입니다. 또 고추장 역시 1433년 발간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1460년의 ≪식료찬요(食療纂要)≫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일본 문헌에는 오히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했다고 나와 있다지요.
1518. 청심환은 조선시대 중국 사행단 필수품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洪大容)은 1766년(영조 42) 중국 연행(燕行)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담헌연기(湛軒燕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나는 그의 종에게 길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을 하며 다른 사람이 주는 품삯만큼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유 씨는 품삯은 필요 없고 청심환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곧 청심환 1알을 꺼내 주었다.” 우황청심환이라고도 하는 청심환(淸心丸)은 사행단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사행길 곳곳에서는 중국인들이 청심환의 효능을 알고, 청심환을 얻으려 갖은 수를 다 썼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어머님이 아프시다고 하고, 사행단 일원이 참외를 훔쳐갔다는 거짓말을 하며 청심환을 얻어야만 사행단을 놔주거나, 사행단이 필요로 한 것을 들어주었지요.
1517. 임금의 태를 모신 태실 우리 겨레는 어머니가 아이를 배자마자 사람으로 생각하여 나이를 셉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서양과 달리 0살이 아니라 1살인 것이지요. 그 때문에 탯줄도 소중히 여겼고, 왕실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그 태를 태실(胎室)에 모셨지요. 태실을 태봉(胎封)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이라는 기구를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깨끗이 씻은 뒤 작은 항아리에 모시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한 뒤 붉은색 끈으로 묶어 이를 큰항아리에 담았지요. 그런 다음 모실 곳을 택해 묻는데 이 의식을 안태(安胎)라고 합니다.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드나듦을 금하는 금표를 세웠으며, 임금 태실은 군사가 지키게 했습니다. 땅이름이 태봉(胎峰)·태산(胎山)·태봉지(胎封址) 라면 이곳에 태실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516. 고조선의 비파형동검, 중국에는 눈엣가시일까? 몸체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붙여진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 표지유물로 봅니다. 그 분포 지역은 서쪽으로는 난하 유역에서, 북쪽으로는 송화강 일대,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부까지 걸쳐 있어 고조선이 거대한 나라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심양의 요령성박물관이나 조양시박물관에 있었던 비파형 동검은 이미 치워 버린 지 오래이며, 내몽고의 적봉박물관이나 오한기박물관 등의 비파형 동검은 진열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한국인이 나타나면 관리인이 두세 명씩 따라붙으며 사진을 찍지 못하게 감시합니다. 그 까닭을 ≪조선왕 독살 사건≫ 등의 책을 써서 유명한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중국인들에게 비파형 동검은 없애버리고 싶은 유물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옛 우리의 땅을 모두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싶은데 비파형동검이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참고 : ≪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랜덤하우스코리아(주), 2007
1515. 아들을 예로 대한 황희 정승의 진정한 자식 교육 조선 세종임금 때 무려 18년간 영의정을 지냈던 명재상 황희 정승이 있었지요.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 유몽인(1559∼1623)이 엮은 <어우야담>에는 그 황희 정승과 기생을 사랑한 그의 아들 황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황희는 아들에게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자 황 정승은 관복 차림으로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지요.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 정승은 말합니다.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했지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김유신이 기생집으로 데려간 말의 목을 벤 것처럼 아들 수신도 술 취한 자신을 기방으로 싣고 간 말의 목을 벴다고 합니다. 진정한 자식 교육이 무엇인지 황희는 가르쳐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