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5. 한국의 춘화, 중국∙일본의 춘화와 무엇이 다를까? 조선시대 이웃 중국과 일본은 춘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춘화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성교 체위를 중점적으로 그리며 정교함과 섬세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황실이나 지배층의 성적 놀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일본 춘화 특징은 과장된 성기를 중심으로 화려한 옷과 가구 등을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중국∙일본과 달리 유교사회인 조선은 후기에 가서야 성행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춘화는 중국∙일본에 견주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과 상황 묘사를 통해 당시 성 풍속을 사실적으로 드러냅니다. 또 한국 춘화는 배경을 이루는 자연을 도구로 써서 남녀의 성적결합과 자연의 음양이치를 한 화면 안에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춘화는 문인화적인 품위와 동시에 서민적인 소박함, 그리고 사람냄새가 나는 따뜻한 그림이라고 평가합니다.
1444. 조선 초기의 원예서, 강희안의 양화소록 강희안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서화가로 그의 그림에는 교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고사관수도, 강호한거도 등이 있습니다. 또 그는 ≪양화소록(養花小錄)≫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은 꽃과 나무의 특성, 품종, 재배법을 정리한 원예전문서입니다. 강희안은 이 책에서, "무릇 꽃을 재배하는 것은 오직 마음과 뜻을 굳건히 닦고 어질고 너그러운 성질을 기르는 데 있다."라면서, 소나무에서는 굳은 의지를, 국화에서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사는 은일(隱逸)을, 매화에서는 높은 품격을, 난초에서는 품격과 운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옛 사람들은 꽃에도 그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나 등수를 매겼습니다. 강희안은 소나무, 대나무, 연꽃, 국화는 1품, 모란은 2품, 사계화, 월계, 왜철쭉, 영산홍, 진송, 석류, 벽오동은 3품으로 나눴는데 이 밖에도 단풍은 4품, 장미는 5품, 목련은 7품, 무궁화는 9품에 들어 있습니다.
1443.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필휘지의 수묵화 수묵화(水墨畵)는 현란한 채색을 피하고 먹만으로 그리는 그림 양식입니다. 수묵화는 기법에 따라 짙은 빛깔의 농묵(濃墨), 옅은 빛깔의 담묵(淡墨), 글씨나 그림에서 먹물이 번져 퍼지게 하는 발묵(潑墨), 그리고 엷은 먹으로 대강 그리고 그 위에 짙은 먹을 더하여 짙거나 옅음에 따라 입체감이나 생동감을 표현하는 파묵(破墨) 등으로 나뉩니다. 중국의 시인 왕유(王維)는 “우주의 만상(萬相)을 집약해서 표현하는 수묵화가 그림 중 으뜸이다.”라고 했습니다. 수묵은 단순히 검정빛이 아니라 온갖 빛깔을 합한 것이며 빛깔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수묵화는 단숨에 그리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완성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또 이것은 피나는 노력으로 법도를 뛰어넘는 데서만 가능한데 책의 기운과 글자의 향기가 없고선 먹물로 비질한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1442. 입 안에 배꽃향이 활짝 퍼지는 문배주 우리의 전통술 가운데에는 문배주라는 것도 있습니다. 문배주는 평안도 지방에서 전해진 알코올 농도가 40도 정도 되는 향토술입니다. 문배주는 1986년 면천두견주·경주교동법주와 함께 무형문화재 제86호 ‘향토술담그기’로 지정되었지요. 문배나무는 우리나라의 토종 돌배나무인데 그 향기는 다른 배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진한 향을 냅니다. 그런데 문배주는 이 문배나무와 관계없이 밀, 좁쌀, 수수만으로 빚어 문배나무의 향기를 만들어 내다고 하지요. 기능보유자 이기춘 선생은 “문배주의 오만하지 않은 청초한 향은 마시고 난 후에도 진하게 가슴에 남아 마시는 이의 마음에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도수는 높지만 마실 때 목구멍이나 혀에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가며, 입 안에 배꽃향이 활짝 퍼진다.”라고 합니다. 문배주는 국빈을 대접하거나 정상회담용으로 많이 쓰입니다. 참고 : 월간 2008년 11월호 “전통의 원형을 찾아서”
1441. 세계문화유산 고인돌을 지석묘라고 부르면 안돼 고인돌은 주검이 누워있는 널방(묘실) 위에 엄청나게 큰 바위를 뚜껑처럼 덮은 거석기념물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한국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것인데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하였으나 권력의 상징물이나 신앙의 대상물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요. 대형 고인돌의 덮개돌 무게는 보통 30∼50톤에 이르며, 심지어 100톤이 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고인돌은 요즘의 중장비로도 이동하거나 받침돌 위에 올릴 수 없는 규모라고 합니다. 지난 2000년 442기가 있는 고창과 함께 화순, 강화지역의 고인돌이 함께 세계문화유산 제977호로 올랐습니다. 고인돌을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대석개묘(大石蓋墓), 기타지역에서는 돌멘(Dolmen)∙거석(巨石, Megalith) 등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고인돌이라는 우리말이 분명히 있는데도 “고인돌이 있는 무덤”이라는 뜻의 일본식 지석묘라고 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다.
1440. 남자의 홑바지, 홑저고리인 “고의적삼”은 토박이말 이기영의 ≪고향≫이라는 작품에는 “옥양목 고의적삼에 모시 두루마기를 해 입고”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고의’는 남자가 여름에 입는 홑바지이고, ‘적삼’은 홑옷 윗도리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고의적삼”을 어떤 이는 “袴衣赤衫”이라고 쓰고는 한자말이라고 합니다. 또 총독부가 1920년에 펴낸 ≪조선어사전≫부터 민중서림 ≪국어대사전≫ 3판 수정판(1998)까지의 우리 국어사전들이 모두 ‘고의’ 낱말 풀이에 ‘袴衣’라는 한자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금강반야바라밀경 삼가해≫(1482)에 ‘ㄱㆍ외’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한자로 ‘袴’ 또는 ‘袴子’라고 했으며, ≪훈몽자회≫(1527)에는 “裙 고의 군, 袴 고의 고”라 했고, ≪박통사≫(1677)와 ≪역어유해≫(1690)에는 ‘袴兒’라고 했지만 ‘袴衣’는 없습니다. 정재도 한말글연구회장에 의하면 ‘ㄱㆍ외’가 →‘고외’ →‘고의’로 바뀌었다며 말의 뜻엔 상관 않고, 음만 비슷하게 나는 한자로 적은 취음(取音)이라고 합니다. 참고 : "고의적삼", 정재도 한말글연구회장
1439. 온 백성이 함께 즐기는 음악 여민락 우리 전통 음악 중 자주 연주되는 곡에 “여민락”이란 것이 있습니다. 여민락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맹자≫ 한 구절과 뜻이 닿아있는 이름인데 될수록 많은 사람이 음악을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이 하나 되어 함께 좋은 풍속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여민락은《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25장 가운데 1, 2, 3, 4장과 종장(終章)을 가사로 얹어 부르던 곡조였으나, 지금은 가사는 부르지 않고 순 기악곡으로만 연주되고 있습니다. 또 여민락은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임금이 온 백성과 함께 즐기자고 만든 음악으로 깊고 바르고 웅대하며 평안한 맛을 주는데 조선시대를 통하여서도 장악원(掌樂院, 조선 궁중의 음악·춤을 관장하던 관청)의 으뜸가는 음악으로 꼽히어 왔다고 합니다. 사용되는 악기는 거문고·가야금·대금·향피리·해금·장고·좌고 등이지요.
1438. 오늘은 입동, 홍시 하나 남겨두는 조선의 마음 “찬 서리 /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은 라는 시에서 이 즈음의 정경을 이야기하며. 까치를 위해 남겨둔 홍시 하나가 “조선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무서리 내리고, 마당가의 감나무 끝엔 까치밥 몇 개만 남아 호올로 외로운 때가 입동이지요. 입동은 바야흐로 겨울의 시작인데 이 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선다(立)'라는 뜻에서 입동이라 부릅니다. 조선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보면 봄가을로 양로잔치를 베풀었는데, 특히 입동(立冬), 동지(冬至), 섣달 그믐날 밤에 나이가 드신 노인들에게는 “치계미(雉鷄米)”라 하여 선물을 드리는 관례가 보편화해 있었습니다. 논밭 한 뙈기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도 한 해에 한 번은 마을 노인들을 위해 기꺼이 금품을 내놓았지요.
1437. 정조, 화성 쌓는 일꾼에게 털모자를 주었다 정조임금은 수원에 화성을 쌓으면서 그곳에 살던 백성을 쫓아내지 않으려고 성곽을 꾸불텅하게 쌓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조의 백성 사랑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성을 쌓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는 팔달산 서쪽 임시 병원에 입원시키고 일당의 50%를 주었습니다. 또 정조는 무더위를 견디도록 ‘척서단(滌署丹)’이라는 약을 주었고, 노동에 힘들어하는 관련자 모두에게 ‘제중단(濟衆丹)’이라고 하는 영양제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더 큰 사랑은 털모자를 준 일입니다. 한겨울 정3품 당상관 이상만이 귀마개를 할 수 있는 시대에 털모자를 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조는 성을 쌓는 백성에게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이에 화성유수 조심태는 장계를 올리면서 임금이 내려준 옷 1벌, 모자 하나가 추위를 전혀 걱정 없게 했다고 말합니다.
1435. 조선시대 공중을 나는 수레, 비거가 있었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이 19세기에 쓴 전체 60권 60책의 백과사전과 같은 책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노성 지방 윤달규라는 사람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 이러한 비거는 날개를 떨치고 먼지를 내면서 하늘에 올라가 뜰 안에서 산책하듯이 상하 사방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거침없이 날아다니니 상쾌한 감은 비길 바 없다. 비거는 우선 수리개와 같이 만들고 거기에 날개를 붙이고 그 안에 틀을 설치하여 사람이 앉게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비거는 단순히 바람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모양은 새와 같고 자벌레나비가 몸을 굽혔다 폈다 하듯이 몸으로 운동에너지를 만들어 그것을 통해 날개를 퍼덕거려 비행하는 방식이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공중을 나는 수레”라는 뜻의 이 비거(飛車)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위를 날았다는 비거인지는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