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의 칠지도는 백제 임금이 하사한 것 일본 나라현[奈良縣]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는 곧은 칼의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모두 7개의 칼날이 있는 칠지도(七支刀)가 있습니다. 이 칠지도는 길이 74.9cm의 칼로 1953년에 일본국보로 지정되었지요.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 칼에 쓰여 있는 글씨 일부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일본 야마토왕국이 백제에게 하사한 것이다거나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왜에게 백제가 진상한 것으로 왜곡합니다. 하지만, 중국 양나라 때 역사서 ≪남제서(南齊書)≫ “백제국전“에 당시 백제가 다섯 속국을 거느렸는데 일본이 그 중 하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나 또 칼에 새겨진 369년 당시는 백제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정점에 올라 있던 때여서 일본 어용학자들의 왜곡은 분명하다고 일본미술사 전문가인 미국인 미술사학자 고 ‘존 카터 코벨‘은 말했습니다. 참고 : “부여 기마족과 왜(왜)”,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글을읽다
1401. 조선시대에는 손톱을 어떻게 했을까? 유교 경전의 하나인 《효경(孝經)》에 “사람의 몸과 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털은 그렇다 치고 손톱과 발톱은 어떻게 했을까요? 조선 숙종 대 문신 이익(李瀷)은 죽기 직전 '조갑명(爪甲銘)', 곧 '손톱과 발톱에 부친 좌우명'을 지어 유언(遺言)으로 삼았습니다. “나 어렸을 때는, 손·발톱 거둘 줄 몰랐다가 보존하게 된 것은 중년부터였다. 모아 둔 것을 합쳐 보니, 손바닥 가득 두 줌이라. 각각 봉투에 싸서, 후손에게 맡겨 부탁하노니, 남긴 머리카락은 베개로 대신하고, 오른쪽에 이것을 채워두어라.”라고 하여 중년 이후의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모아 관(棺)에 넣고 선산(先山)에 누운 부모님께 갔죠. 결국, 조선시대에도 가위로 손톱 발톱을 깎았는데 아기들은 포도지정처럼 어머니가 이로 조근조근 씹어서 잘라줬답니다.
1399. 한가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월이 풍속을 바꾸는 탓인지 점차 가정에서 송편을 빚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어쩌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진 탓일 수도 있으며, 개인주의가 만연되어 식구들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면 한가위에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오순도순 얘기꽃을 피우며 송편을 빚어보는 행복함을 누려보면 어떨까요? 또 송편에 솔잎을 까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소나무가 피톤치드로 썩는 것을 막아주듯 곧은 인품으로 다른 사람을 건강하게 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을 더듬어보고 훈훈한 입김을 쐬면 나의 잘못된 생활이 올곧게 정리될 수 있겠지요. 이 가을에는 솔잎을 깔고 찐 송편처럼 향기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내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어떨까요?
1398. 한가위의 세시풍속, 거북놀이 이야기 한가위 큰 명절의 각종 세시풍속 가운데는 '거북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거북놀이는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처럼 엮어 등에 메고, 엉금엉금 기어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입니다. 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동해 용왕의 아드님 거북이 행차시오!”라고 소리치며, 풍물패가 집집이 방문하지요. 대문을 들어서면서 문굿으로 시작하여 마당, 조왕(부엌), 장독대, 곳간, 마구간, 뒷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들보 밑에서 성주풀이를 합니다. 조왕에 가면 “빈 솥에다 맹물 붓고 불만 때도 밥이 가득, 밥이 가득!” 마구간에 가면 “새끼를 낳으면 열에 열 마리가 쑥쑥 빠지네!” 하면서 비나리를 하지요. 이렇게 집집이 돌 때 주인은 곡식이나 돈을 형편껏, 성의껏 내놓고 이것을 공동기금으로 잘 두었다가 마을의 큰일에 씁니다. 이렇게 거북놀이는 풍물굿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시풍속입니다.
1397. 한복연구가들이 한복을 입지 않으면? 요즘 한가위를 며칠 앞두고 방송에서는 한복을 입은 모습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한복연구가라며 특별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운 부분은 한복연구가들이 한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한복의 아름다움이나 훌륭함을 극구 칭찬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입지 않으니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몇 년 전 한 대학에서는 한복국제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토론자로 그 자리에 참석했었지요. 그런데 백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 한복을 입은 사람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그 자리엔 한복계의 유명한 인사도 참여해 격려사를 해주기도 했지만 그도 역시 안 입기는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저는 토론시간을 모두 써서 그 이야기만 했습니다. 일반이이 입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복전문가들이 한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성도 프로정신도 없는 모습 아닐까요?
1396. 꿩고기김치 담그는 법을 아시나요?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1670년(현종 11년)경에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安東 張氏)가 쓴 조리서입니다.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합니다. 음식디미방의 제목을 풀이하면 '음식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이 음식디미방에는 ‘앵두편병’ 등의 ‘면병류(국수와 떡)’ 18종, ‘누렁개 삶는 법’ 등의 어육류 74종, ‘별주’ 등의 ‘주국방문(술)’ 51종과 식초 담는 법 따위가 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꿩고기김치 담그는 법도 나옵니다. “간이 든 오이지의 껍질을 벗겨 속을 제거해 버리고, 가늘게 한 치 길이 정도로 도톰도톰하게 썰어라. (오이지의 간 든) 물을 우려내고 꿩고기를 삶아 그 오이지처럼 썰어서 따뜻한 물과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김치처럼 담가 삭혀서 써라.”(현대어 번역 백두현) 참고 : “음식디미방 주해”, 백두현, 글누림
1395. 사냥에 쓰이는 보라매 이야기 대한민국 공군의 상징은 보라매입니다. 보라매는 난 지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로 아직 새끼여서 털갈이를 하지 않은 까닭에 보랏빛을 띠기 때문에 보라매라고 합니다. 청색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청매(靑梅)라 부르기도 하며, 새타령에 나오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의 해동청(海東靑)은 바로 한국의 청매라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이 보라매는 고구려 때에도 사냥에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삼실총 벽화에 매를 팔에 앉힌 말 탄 사냥꾼 그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보라매는 일본에도 건너갔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왕자 주군(酒君)이 일본에 매 사냥을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군은 백제로부터 이 보라매를 수입하고 관리했던 ‘응감부(鷹甘部)’라는 관청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죽은 뒤 닌도쿠왕으로부터 ‘응견신(鷹見神)’이라는 시호까지 받았습니다. 참고 : “부여기마족과 왜(倭)”, 조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글을읽다
1394. 사람의 입은 아가리, 주둥이라고 쓰면 안 돼 사람에게는 “입”이라고 하는 기관이 있는데 입은 입술에서 목구멍까지를 이르는 말로 음식을 먹거나 목소리를 내는 기관이지요. 그런데 험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아가리 닥쳐”라고 소리칩니다. 말을 멈추라는 뜻으로 쓰는 이 말은 과연 써도 되는 말일까요? 원래 아가리, 주둥이, 부리도 입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이 말들은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에게 쓰면 욕이 됩니다. 아가리는 ‘범의 아가리’처럼 비교적 큰 짐승의 입을 가리킬 때 쓰며, 주둥이는 큰짐승이 아닌 대부분의 물고기, 새, 젖먹이 짐승, 개구리 등 양서류의 입을 말하고, 부리는 새처럼 뾰족한 입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뿔처럼 딱딱한 재질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대갈’, 이마를 ‘마빡’, 목을 ‘모가지’, 손목을 ‘손모가지, 배를 ’배때기‘라고 쓰는 것과 함께 ’아가리, 주둥이. 부리‘는 비속어가 되는 것으로 써서는 안 되지요. 참고 : “나만 모르는 우리말”, 조경숙․김슬옹․김형배, 모멘토
1393.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본 조선 기생 “우리 같은 여행자 앞에 나오는 기생은 예쁘고 내지인 취향에 맞는 잘 나가는 기생인데 반해, 조선인들 자리에는 보다 조선적인 기생이 있어서 나름의 식견이 있고, 자못 명기다운 품격을 갖춘 이가 나왔다. 어쩌다 합석하여 본 조선인만의 연회석에 있던 기생은 볼연지도 하지 않고, 눈썹도 그리지 않은 맨얼굴이 아름다우며 피부는 물처럼 차갑고 투명했다. 그 기생이 가야금을 치며 진지하게 부르는 남도의 노랫가락에서 진짜 조선을 느낀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노랫소리에 푹 빠져 들었다.” 1939년에 펴낸 잡지 조선판의 “조선독본”이란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우리의 품격을 드러내는지 일본인이 웅변적으로 말해주었습니다. 당시 진정한 기생은 일본인을 위한 술자리에 나가는 그런 화려한 기생이 아니라 조선의 품격을 가야금과 남도 노랫가락으로 보여준 조선의 여성이었습니다. 참고 : “모던일본과 조선 1939”, 윤소영 외, 어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