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 세종, 들판을 지날 때 일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다 성군 세종임금이 백성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특히 세종임금은 백성을 만날 때 늘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그들을 섬기는 자세를 보였으며, 호소 받은 민폐를 바로 처리해주었기 때문에 조정 신료들은 물론이고 백성으로부터도 신뢰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은 들판을 지나갈 때면 일산(日傘, 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으며, 벼가 잘되지 않은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또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했지요.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모 연구교수는 이런 세종의 백성 사랑을 증언하고 또 증언합니다. 절대군주 시대 세종임금의 이런 백성사랑은 민주주의 시대라는 현대 정치인과 견주게 됩니다.
1381. 음식디미방, 규곤시의방 무엇이 맞을까?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1670년(현종 11년)경에 정부인 안동 장씨가 쓴 궁체로 쓰인 필사본 조리서입니다. 이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지요. 음식디미방은 예부터 전해오거나 장씨 부인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 등,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했지요. 또 가루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과 어육류, 각종 술담그기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책 표지에는 '규곤시의방'이라고 쓰여 있고, 내용 첫머리에는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고 쓰여 있어서 어떤 것이 진짜 책 이름인지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음식디미방'은 지은이가 직접 쓴 것이지만 '규곤시의방'은 장씨 남편이나 후손이 품격을 높이기 위해 지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짜 이름은 ≪음식디미방)≫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참고 : ≪음식디미방) 주해≫, 백두현, 글누림
1380. 오늘은 광복절, 진정한 광복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광복절인데 해방된 지 벌써 63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맞았는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혹시 우리가 빌미를 준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아직도 곤색, 닭도리탕, 애매모호 따위의 일본말 찌꺼기들을 쓰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요? 특히 일본이 조선을 멸시하는 의미로 썼던 이씨(李氏)의 조선(朝鮮)이라는 뜻의 이조(李朝,りちよう)와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를 일본제국이 '민비'로 낮춰 부른 것을 따라 쓰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도 식민사관에 의해 쓰였기에 자랑스러운 역사 고조선을 신화로 만들었으며, 일본에서 건너온 녹차와 다도를 마치 우리 것인 양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고, 한복은 외면하고 기모노에 열광하는 청소년도 있음은 진정한 광복은 아닐 것입니다.
1379. 이 시대 우리는 불초소생이 아닐까? “불초소생(不肖小生)”이란 말을 아시나요? 예전 사람들은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땐 꼭 이 불초소생이란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매우 훌륭하신 부모님을 이 자식이 못나고 모자라서 감히 부모님을 닮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겸양어로 쓰이는 말이지요. 닮지 않았다는 데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원래 곡류와 채소를 많이 먹어 얼굴이 네모났는데 지금의 후손은 서양에서 들어온 부드러운 음식만 먹어 달걀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조상을 닮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탓에 여러 가지 병이 늘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면은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삶이 이웃과 자연을 외면해서 자신이나 식구만 위하는 이기적인 삶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할 진정 불초소생의 모습이 아닐까요?
1378. 길 이름들, 속길ㆍ뒤안길ㆍ등굽잇길ㆍ에움길 행정 용어나 법률 용어를 보면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빚을 갚다”로 쓰면 될 것을 “변제하다”라고 쓰거나 “속길”이라고 쓰면 될 것을 “이면도로”라고 씁니다. 속길이나 이면도로나 모두 마을 안 길입니다. 그런가 하면 늘어선 집들의 뒤쪽으로 난 길은 “뒤안길”입니다. 또 길 이름에 “등굽잇길”, “굽돌이길”과 “에움길”도 있습니다. “등굽잇길”은 등처럼 굽은 길로 비교적 완만하게 활처럼 휘어진 길을 말하고, “굽돌이길”은 급히 돌아가는 커브길입니다. 그리고 “에움길”도 있습니다. “에움길”은 빙 둘러서 가는 길을 말합니다. 가까운 방향으로 질러가는 길이 “지름길”이라면 이와는 달리 빙 둘러서 가는 우회로를 일컬어 “에움길”이라고 하는데 “두름길”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알아둘 것은 본디 길이 없던 곳인데 많은 사람이 지나가 한 갈래로 난 길을 “통길”이라고 합니다.
1377. 상고시대 사회 풍속은 어땠을까? 고조선을 비롯한 부여, 예, 삼한 등 우리 상고시대의 풍속은 어땠을까요? 고조선의 “범금8조(犯禁八條)”를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예로 삼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조선 사회가 사유재산을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조선 부인들은 정절이 있으며, 신의가 있고, 음탕하지 않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또 ≪삼국지≫ “위서동이전” ‘예조’에 동예에서는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았다고 하며,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조’에 부여에서 남녀 모두 음란한 짓을 하면 죽였는데 투기하는 부녀자는 죽인 뒤 산 위에 버려두어 썩게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런 기록들을 보면 우리 상고시대는 도덕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ㆍ김병기, 역사의아침
1376. 훈민정음 서문의 “중국”은 중국(China)을 가리킨다 일부 사람들은 “훈민정음 서문의 이 한글창제 당시에는 중국(China)이란 나라가 없었으므로 '나라 중에서(가운데에서)' 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조선초만 하더라도 세상 가운데는 중국이 있다고 생각했고, 명은 하나의 왕조에 불과했기에 훈민정음에 "명과 달아"로 쓰지 않고 "듕궉에 달아"라고 쓴 것입니다. 세종왕조실록 세종 즉위년(1418년) 12월 27일 6번째 기사에 “예조에서 임금께 올리기를, ‘대마도의 왜인 유온이 중국 여자를 거느리고 나와서 전하에게 바치고자 한다고 하옵는데, 어떻게 처리하오리까.’ 하니, 임금이 ‘중국으로 보내라.’라고 명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처럼 당시는 중국을 가리켜 경우에 따라 중국(中國), 상국(上國), 중조(中朝)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서문의 “중국”은 분명히 China와 같은 뜻입니다.
1375. 부여 사람들 흰옷을 숭상했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조에 보면 다음의 내용이 보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흰옷을 숭상하여 겉옷인 장의와 바지는 흰옷으로 만들어 입었으며, 가죽신을 신었다. 국경 밖으로 나갈 때는 비단옷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대인들은 여기에 여우나 짐승의 모피 혹은 희거나 검은 담비 모피가 붙은 장의를 입었고, 머리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 이를 보면 우리 겨레가 흰옷을 좋아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흰옷을 좋아했던 우리 겨레는 일제강점기 당시 장터 들머리에 먹물을 담은 솥을 걸어놓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끼얹기도 했지만 흰옷을 입으려는 배달겨레의 생각은 꺾을 수가 없었지요.
1374. 오늘은 입추, 내일은 말복 오늘은 24절기의 열세 번째인 입추이며, 내일은 말복입니다. 사전에서 보면 입추는 '가을이 시작되는 날'이고, 말복(末伏)은 '여름의 마지막 더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입추가 말복 뒤에 와야 하는데 우리의 조상은 그렇게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조금씩은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다 그렇지요. 참고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입추(立錐)는 24절기 입추(立秋)와는 관계가 없지요. “송곳(錐)을 세울(立) 만한 여유(餘地)가 없다.” 곧, 아주 좁고 여유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373. 술 마실 때의 예절 옛사람들은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는 특히 행동을 삼갔는데, 먼저 어른에게 술잔을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시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았습니다. 또 어른이 마신 뒤에야 비로소 잔을 비우며,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므로 돌아앉거나 윗몸을 뒤로 돌려 마시기도 했습니다. 술잔을 어른께 드리고 술을 따를 때 도포의 배래(소매 아랫부분)가 음식물에 닿을까 봐 왼손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술을 따르는 풍속이 생겼지요. 이런 예법은 현대에 와서 소매가 넓지 않은 양복을 입고 살면서도 왼손을 오른팔 아래에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지금껏 남아 있습니다. 술은 임금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겨 마셨기 때문에 주례는 술과 함께 매우 일찍부터 있었는데 의 '향음조(鄕飮條)'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이 주례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