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 선짓국ㆍ콩나물국ㆍ북어국은 슬기로운 속풀이 음식 술 먹은 뒤에 먹는 속풀이 해장국에는 서울 청진동 선짓국, 전주 콩나물국, 섬진강변 재첩국, 충청도 내륙 올갱이국, 강원도 산간지방 북어국 따위가 있습니다. 이 해장국들은 음주가무에 능했던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이 만들어낸 속풀이 음식입니다. 먼저 선짓국에는 섬유소가 풍부한 우거지가 들어 있고, 콩나물국은 알코올 분해 능력이 뛰어난 콩나물이 주재료로 숙취 해소 능력이 뛰어나며, 재첩국이나 올갱이국에 들어가는 재첩과 다슬기 그리고 부추는 간 기능 보호에 좋다고 하며, 재첩은 민간에서 즙을 내어 황달치료에 쓸 정도로 훌륭한 음식재료입니다. 또 북어국은 아미노산 성분인 메티오닌이 풍부해 술독에 지친 간을 달래 줍니다. 이밖에 뼈다귀해장국, 부산의 돼지국밥, 북부지방의 순댓국밥도 좋다고 하지요. 혹시 어젯밤 술을 드신 분들은 이 해장국을 드시면 어떨까요?
1361. 훈민정음 28자면 세계 어떤 나라 말도 쓸 수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바람소리, 학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무엇이든지 소리 나는 대로 글자로 쓸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글 온글자 총수는 무려 11,172자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리를 가진 글자여서 그 어떤 나라 말도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글자 없는 민족에게 한글로 글자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실제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글자 없는 나라에 글자를 만들어주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훈민정음연구소 반재원 소장과 태극원리연구소 허정윤 소장이 공저로 펴낸 ≪옛글자를 사용한 21개 외국어회화 표기 예≫(도서출판 한배달)에서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 힌디어, 미얀마어까지 훈민정음 28자를 활용한 표기를 예를선보였습니다. 지은이들은 현재 쓰는 24글자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옛글자를 포함한 28자면 어떤 말도 가능하다는 실례를 보여준 것입니다.
1360. 지게는 조선인의 탁월한 발명품 지게는 우리 겨레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라고 합니다. 가지가 조금 위로 벋어난 자연목 2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우고 사이사이에 3~4개의 세장(가로질러 박은 나무)을 끼우고 위아래로 멜빵을 걸어 어깨에 멥니다. 그리고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으로 두툼하게 짠 등태를 달아놓았으며 이것을 세울 때에는 끝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진 작대기를 세장에 걸어둡니다. 한국전쟁 때 미군은 이 지게를 “A FRAME(A자 모양의 틀)”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가 1901년에 펴낸 ≪한국견문록≫에는 “사람이 어깨 근육을 이용해서 힘을 덜 들이고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조선인의 탁월한 발명품이라 하고 싶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도는 “지게는 양 어깨와 등의 힘을 조화시킨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운반기구다.”라고 말했습니다.
1359. 임진왜란 때 수군이 연전연승한 까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군은 행주산성 전투를 빼고는 일본군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습니다. 명장 신립장군도 탄금대 전투에서 처절한 참패를 했었지요. 당시 일본군 조총을 당해낼 수가 없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연전연승하였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거북선과 판옥선에 천 ‧ 지 ‧ 현 ‧ 황자총통 등 대형화포를 장착하여 싸웠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대형 화포는 원거리에서 적선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지녔던 것입니다. 당시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뱃전을 붙이고 백병전을 편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뛰어나 장수 이순신과 함께 대형화포의 위력이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1358. 조선시대에도 춘화를 팔고 사고 했을까? 조선시대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춘화(春畵)는 남녀 사이의 성희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말하는데 춘정화(春情畵)·춘의화(春意畵)·운우도(雲雨圖)라고도 합니다. 춘화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크게 나돌았지만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간 사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 간혹 숨겨 오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17~18세기) 인구도 늘고 새롭게 중인 부유층이 생기면서 기방과 색주가가 많이 늘었는데 이때 점차 춘화의 판매가 성행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창작된 민요 ‘한양가’에 보면 광통교 다리 위에 걸어놓고 파는 그림에 춘화가 있으며, ‘춘향전’의 한 이본에도 춘향의 방 안을 묘사하면서 춘화를 얘기합니다. 풍속화 대가였던 김홍도, 신윤복이 춘화를 그렸는데 중국, 일본과 달리 예술적인 격조가 있었던 우리의 춘화는 값싼 일본 춘화가 들어온 19세기 말 사라졌습니다.
1357. 원나라 시인이 칭찬한 고려의 쌈 "해당화는 꽃이 붉어 더욱 좋고, 살구는 누래 보기 좋구나.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치로고, 마고의 향기보다 그윽하다.” 위 글은 원 나라 시인 양윤부가 고려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상추에 대해 쓴 시입니다.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는 정월대보름 나물 잎에 밥을 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쌈을 무척이나 좋아하여 쌈민족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입니다. 잎이 큰 상추, 곰취는 물론 깻잎, 호박잎, 배춧잎, 콩잎, 쑥갓 따위를 쌈 재료로 썼는데 최근엔 케일, 신선초, 겨자잎 같은 서양 채소로도 쌈을 싸먹습니다. 그 쌈문화의 결정판은 바로 아홉 개의 칸으로 나누어진 그릇에 제각각 개성이 다른 음식들 곧 채소류, 고기류, 버섯류, 해산물, 달걀 지단 등을 담아 내는 ‘구절판’입니다. 구절판은 오색과 오미의 어우러짐이 있는 음양오행 철학이 담긴 음식입니다.
1356. 조선시대 대표적인 세시풍속 책 조선시대 대표적인 세시풍속 책에는 먼저 조선 영조·정조 때의 문신 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습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습니다. 이 책 상권에는 옷 ·음식 ·집 ·시화(詩畵) 등 풍속을 19항으로 나누어 쓰고, 하권에서는 서울 지방의 세시를 19항으로 나누어 기록했지요. 또 조선 후기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1849년(헌종 15)에 펴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많이 알려졌습니다. 예부터 전해온 연중행사와 풍습을 설명한 책으로서, 민간 풍속을 적은 책 중에서 가장 소상하며, 이미 사라진 세시풍속까지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밖에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도 있는데 이 책은 조선 순조 때 김매순이 열양(洌陽), 곧 한양(漢陽)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것입니다.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는 이 세 책을 모아 신식 활자로 출판하였지요.
1355. 대령숙수, 조선시대 궁중 남자전문조리사 조선시대 후기 궁중에서는 평상시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을 조리하는 일은 주로 내인인 주방상궁들이 만들었으며, 궁중의 잔치인 진연이나 진찬 때는 대령숙수(待令熟手)라고 하는 남자조리사들이 만들었습니다. 대령(待令)이란 왕명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숙수(熟手)는 조리사를 일컫습니다. 이들은 궁중음식을 맡은 이조(吏曹) 사옹원(司饔院)에 속해 있었으며 총책임자는 정3품의 제거였습니다. 대령숙수는 세습에 의해 대대로 이어졌고, 궁 밖에 살면서 궁중의 잔치인 진연(進宴)이나 진찬 때 입궐해 음식을 만들었지요. 솜씨가 좋은 대령숙수는 임금의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라의 잔치인 진연 때는 진연도감(進宴都監)이 일시적으로 설치되고 숙설소(熟設所) 곧 궁중에서 큰 잔지를 준비하려고 임시로 세운 주방을 세웁니다. 숙설소에는 감관이 파견되고 40~50명에 이르는 숙수가 음식을 담당하였지요.
1354. 어려운 말을 아름다운 토박이말로 바꿔 쓰기 법률용어에 보면 “빚을 갚다”라면 될 것을 “변제하다”란 한자말을 써서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잘난 채이거나 아니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되도록 한자말이나 외래어 대신 아름다운 토박이말로 써보면 어떨까요? 처음엔 조금 어색할 수도 있지만 토박이말의 아름다움에 금방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풍을 ‘가만한 바람’, 모자이크를 ‘쪽모이’, 미니스커트를 ‘깡뚱치마’, 서약서를 ‘다짐글’, 소제를 ‘글감’ 또는 ‘글거리’라고 바꿔 쓰면 좋을 일입니다. 또 ‘야속(野俗)하다.’를 ‘고깝다’로 회유책을 ‘달램수’, 공지를 ‘알림’, 검색을 ‘찾기’로 써보면 어떨까요? 제 경험으로 보면 어렵지 않은 토박이말을 쓰는 것은 읽는이로 하여금 훨씬 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1353. 대장장이 출신이 임금이 되었었다 어렸을 때 대장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풍로의 세찬 바람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쇳덩이를 집어내 꽝꽝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모습을 넋이 빠져라 쳐다봤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지요. 옛날에는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였습니다. 쇠를 만드는 곳을 야장(冶場)이라 하고, 특별히 쇠를 만드는 기술자는 수철장(水鐵匠)이라고 하는데 수철장은 야장에서 얻은 쇳덩이 곧 판장쇠를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다양한 물건으로 가공했습니다. 그리고 대장간에서 쇠를 다루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하는데 청동기 시대 이후 생겼을 것이고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으며, 특히 대장장이 출신의 석탈해는 신라 임금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대장장이들은 조선시대로 오면 천한 신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