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2. 식구가 가족, 동기가 형제, 내외가 부부로 일제 35년 식민통치시대 이후 많은 지식인이 일본말을 무분별하게 들여와 쓰는 것을 예사로 하면서 우리말은 더럽혀졌습니다. 해방을 맞은 지 60년이 넘었는데도 우리는 아직 일본말 찌꺼기를 여전히 씁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한 자리에서도 수많은 일본말 찌꺼기를 듣습니다. 특히 ‘모호하다’, ‘어정쩡하다’ 따위의 우리말이 있는데도 ‘애매하다’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애매는 일본말 ‘曖昧(あいまい)’를 수입해온 것이며 더구나 "애매모호"라는 말은 ‘역전앞’과 같이 중복된 말이고, 우리말에도 물론 “애매”가 있지만 그 뜻은 전혀 다른 “억울하다.”입니다. 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자주 쓰이던 ‘식구’라는 우리말이 ‘가족’으로, ‘동기’가 ‘형제’로, ‘내외’가 ‘부부’로 굳어졌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축제(祝祭,まつり)’ 대신 잔치·축전으로, ‘십팔번(十八番, じゆうはちばん)’ 대신 애창곡이라고 쓰면 좋겠습니다.
1321. 윤두서 자화상, 왜 귀 없는 얼굴만 있을까? 조선후기 선비화가 윤두서 자화상은 기이하게도 몸뿐이 아니라 목과 귀도 없습니다. 그 까닭을 ≪한국의 미 특강≫,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쓴 고 오주석 교수는 미완성의 상태에서 관리소홀로 밑그림이 지워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책을 펴냈던 조정육 선생은 오주석 선생과는 다른 해석을 합니다. “조선의 초상화를 보면 극사실화라고 하지만 실제론 구도에 따라 특징을 살리는 그림들이다. 예를 들면 조선의 초상화들은 한결같이 눈은 정면인데 코는 1/4 정도 틀어져 있다. 또 귀는 한쪽만 그리는 것은 물론 당나귀처럼 길게 그린다. 윤두서 자화상에서 귀를 그리면 이상할 것이다. 윤두서는 철저히 구도를 바라봤기에 귀를 생략했다고 본다.” 이 말을 듣고 다시 바라본 조선시대의 초상들에서 그런 특징이 분명했습니다.
1320. 세종의 화법, 묻고 잠시 멈춰서 기다렸다 세종임금을 통해 한국형리더십을 찾는 학술회의가 14일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박현모 교수는 “세종임금은 회의 안건을 제시한 다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멈춰서(止) 신하들의 말을 기다렸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말을 줄임으로써 신하들의 입을 열게 했다. 그 결과 신하들은 마음속에 있는 아이디어와 방책들을 쏟아놓았다.” 또 “세종은 회의할 때 신하들의 말을 일단 수긍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되 최종적으로는 국왕 자신의 판단과 책임 아래에 일을 추진했다.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토론만을 위한 회의가 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여 구성원들이 화합하는 가운데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했다.”라며 현대 권력자들이 이런 세종의 화법을 본받기를 강조했습니다.
1319. 오늘은 세종임금 탄신, 어디서 태어나셨을까? 한국 사람치고 한글이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위대한 인물 세종임금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잘 모릅니다. 새 정부는 국어·국사까지도 영어로 수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주 세종영릉의 세종대왕 동상 비문엔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훈민정음 서문과 달리 “나라에 독특한 글자가 없음을 한탄하시어…”라고 쓰여 한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는 듯합니다. 세종임금은 1397년 5월 15일 경복궁 옆 준수방 곧 태종(당시 왕자 이방원)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세계 어디든 웬만한 위인이면 생가를 복원한다고 아우성이지만 세종임금은 작은 비석 하나만 길가에 뎅그러니 서 있습니다. 그 비석엔 커피가 남은 종이컵과 쓰레기봉투들이 둘러싸여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1318. “서동요” 가·무·악이 어우러진 창극으로 공연된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 남 몰래 정을 통하고(他密只嫁良置古) / 서동을 (薯童房乙) / 밤에 몰래 안고 간다(夜矣卵乙抱遣去如)” 위는 후에 제30대 임금(무왕)이 된 백제의 서동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민요 형식의 노래입니다.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하는데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2005년엔 SBS에서 드라마로 방송되기도 했었지요. 부여군충남국악단(음악감독 최경만)은 이 백제 무왕의 국경없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서동요를 가(歌).무(舞).악(樂)이 어우러진 형식의 창극 “서동의 노래”로 만들어 지난 2007년 제53회 백제문화제 때 초연했었는데 이를 다시 가다듬어 오는 5월 21일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서울 시민에게 선보입니다.
1317. 세종임금의 백성사랑이 자격루를 낳았다 세종 때는 해시계 등으로 시간을 측정하여 파루와 인정을 침으로써 성문을 열고 닫았습니다. 그런데 파루를 치던 군사는 격무에 시달려 졸다가 파루·인정 칠 시간을 놓쳐 매를 맞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요. 그때 세종임금은 그것이 꼭 군사의 잘못만은 아니라며 장영실을 시켜 자명종 시계(자격루)를 만들게 했습니다. 또 일식이 하늘의 경고라고 보고 구식례(救食禮)를 행하려다 중국에 맞춘 예보가 1각이 늦어 예보관에게 장형을 내리자 그의 잘못이 아니라며 세종이 오목해시계(앙부일구), 혼천의 등 천문기구와 시계를 만들도록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세종 18년(1435년)에는 시각장애인 지화에게 종3품 벼슬을 주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관청인 명통사에 쌀과 콩을 주어 시각장애인을 지원한 기록도 있으며, 장영실은 관노였지만 세종이 정4품 호군까지 올려놓았습니다. 백성사랑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절대군주 세종임금은 이렇게 따뜻했지요.
1316. 온 나라에 ‘경복궁’이 181개가 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통해 ‘경복궁’이란 글자를 검색하면 무려 181개가 나옵니다. ‘경복궁’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에만 있는 것 아니라 온 나라 곳곳에 있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181개 ‘경복궁’ 가운데 진짜 조선시대의 궁궐 ‘경복궁’은 단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먹고 마시는 음식점과 술집뿐입니다. 특히 ‘경복궁’이란 이름을 내건 업소는 단란주점, 룸살롱, 요정 등 이른바 유흥업소가 꽤 많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른바 ‘로열 마케팅’이라고 합니다. 왕실이 쓰던 최고급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줌으로 인해서 제품 판매를 극대화하려는 얄팍한 수단이지요. 하지만, 선조가 우리에게 물려준 위엄있는 궁궐을 우리는 후손에게 룸살롱 혹은 러브호텔로 물려주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아무리 돈을 버는 게 중요하지만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그렇게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참고 : “문화재청 사람들의 문화유산 이야기” 가운데 강임산의 "왕처럼 살고 싶은가, 우리들", (주) 눌와
1315. 화가 최북, 판소리 명창 임방울, 그리고 세종의 태어남 서양 화가 가운데는 자신의 귀를 잘라 유명한 고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조선시대엔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최북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세력가가 강제로 그림을 그리게 하자 차리리 그림을 못 그릴지언정 억지로 그리지는 않겠다는 치열한 예술혼이었지요. 유명했던 영국 가수 비틀즈를 모르는 사람 역시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음반 12만 장을 팔아 지금의 백만 장을 판 것보다 더 대단했던 판소리 명창 임방울은 잘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가장 위대한 인물 세종임금이 1397년 5월 15일 경복궁 옆 준수방(이방원 사가)에서 태어났음도 잘 모릅니다. 그러고도 우리가 우리나라에 대해, 우리 문화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제라도 우리 것,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당당한 자세를 갖는 것이 배달겨레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이 아닐까요?
1314. 선비들은 연전이라 하여 벼루를 사랑했다 예부터 선비들에게 글쓰기는 갖추어야 할 기본 교양의 하나였기에 선비들 서재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소모품인 붓·종이·먹과 달리 벼루는 오래 두고 쓰는 것이어서 더욱 아꼈지요. 농부에게 논밭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듯이 벼루를 “연전(硯田)”이라 하고 "붓으로 농사를 짓는다(以筆爲耕)."라는 말을 하여 선비들이 글을 쓰는 데 벼루를 가장 종요로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벼루는 도기를 구워 만들기도 하고 옥이나 보석, 상아, 쇠, 나무 따위로 만들기도 했지만 역시 돌벼루(石硯)가 선비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벼룻돌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충남 보령 대천에서 나는 남포석(藍浦石)과 압록강변의 위원석(渭原石), 해주의 장산곶돌 등이 있는데 특히 위원석 벼루는 위원단계(渭原端溪)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여 중국의 단계연 못지않은 평가를 받습니다.
1313. 8대 문명권 일본과 중국 문명의 아류 한국?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은 세계 문명권을 8개로 나누면서 일본도 하나의 문화권으로 설정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민속신앙 ‘신토(神道)’를 고유한 종교문화로 인정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은 중국의 패러디”라고 했으며, 라이샤워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국 문화의 한 변이형으로 보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일본은 민속신앙도 대단한 것으로 인정하고 세계에 알리지만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스스로 자국의 무속신앙인 ‘굿문화’를 미신으로 치부하여 ‘한국 샤머니즘’으로 낮추는 데서 온 것이라고 안동대 임재해 교수는 지적합니다. 자신의 몸에서 영혼을 분리하여 다른 세상을 여행하는 샤먼과 외부의 영혼이 신내림을 통해 몸으로 들어와 빙의를 이루어 신통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무당과는 전혀 다른 방식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고 :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임재해, 지식산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