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2. 훈민정음과 동의보감이 표절일까요?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사학자들과 최근 중국 동북공정 관계자들은 우리의 고조선 역사를 깡그리 짓밟았습니다. 그저 기자, 위만조선만을 내세워 중국 식민지로 둔갑시킨 가짜 조선만 인정하고 고조선은 그저 신화의 세계에 머물게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이는 세종임금이 고조선 때의 가림토 문자를 표절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훈민정음은 자기들의 신대문자를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 아닐까요? 또 다른 이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중국 의서를 베껴 쓴 것이라고 말하지요. 이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한국인의 얘기인데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요? 이런 논리는 정도만 다를 뿐 고조선이 우리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세계가 우리를 무시하도록 빌미를 주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1301. 대나무에 인두로 지져서 그림을 그리는 낙죽장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을 아시나요? ‘낙죽장(烙竹匠)’은 대나무 등 나무에 인두로 지져서 무늬·그림·글씨를 그려 새기는 전통적 기법의 장인을 가리킵니다. 나무 외에 종이·비단·가죽에도 인두를 달구어서 낙죽과 같이 새기는 기법이 있어, 넓게는 낙화(烙畵)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주로 합죽선·붓대·바느질 자·참빗 등 대나무로 만드는 물건의 겉에 매우 가늘게 선으로만 그리는 장식으로 많이 사용되어 낙죽이라는 이름이 굳혀졌지요. 낙죽의 도구는 인두와 화로뿐입니다. 인두는 바느질인두와는 달리 호미처럼 ㄱ자로 안으로 굽었고, 인두의 몸은 앵무새부리처럼 두툼하게 둥글었으나 끝은 뾰족합니다. 인두질은 한 번 달군 인두가 식기 전에 한 무늬, 한 글씨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그 속도 조절 등에 기술이 필요하지요.
1300. 주변 사람들이 잘못된 말을 쓰면 바로잡아 주세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잘못된 말을 쓰면서도 그 말이 잘못된 줄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아내’라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와이프’란 외국어를 쓰고,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써야 할 때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쓰며, 잘못된 음식 이름 ‘닭도리탕’도 예사로 씁니다. 또 어떤 이는 일부러 남이 쉽게 못 알아들을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말을 마구 씁니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없기에 나라말은 병들어 갑니다. 그래서 남이 잘못된 말을 할 때 이를 꾸짖는 기분이 들지 않게 지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어! 그 말 예전엔 나도 그렇게 썼었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쓰지만, 잘못된 말이라고 하더라.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라고 말입니다. 특히 방송에서 잘못된 말을 쓸 때 지적해주는 것은 아주 종요롭습니다.
1299. 중국은 황제 민족주의, 우리는 한의학 미신 취급 중국은 지난해 4월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바위산에 염제와 황제 얼굴 조각상을 완성했습니다. 염제(炎帝)는 중국 고대 불의 신이고, 황제(黃帝)는 중의학 경전으로 불리는 ≪내경(內經)≫의 저자로 알려졌는데 모두 신화 속 인물입니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높이 106미터에 이르는 이 커다란 조각상을 보려고 중국 곳곳에서 구경꾼이 몰려들고 있다고 보도합니다. 중국은 이 커다란 얼굴 조각상으로 “황제민족주의(黃帝民族主義)”를 부추기려 한다고 언론들은 말합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의성 허준은 푸대접을 받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중국 동의학 책들을 베껴 쓴 표절서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의학은 중국 동의학과는 분명히 다른 우리 땅, 우리 겨레에게 잘 맞는 의학일 것입니다.
1298. 옛 살림살이 뒤주 이야기 이젠 뒤주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뒤주는 예전 조선 사람의 집이면 어디에든 있었습니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비참한 삶을 마쳤지만 원래 뒤주는 쌀 ·콩 ·팥 따위 곡식을 담아 두는 살림살이의 하나이지요. 재료는 회화나무가 가장 좋으며, 두꺼운 통판으로 듬직하게 궤짝처럼 짜고 네 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렸습니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어서 뚜껑이 곧 문이기도 하며, 장석은 무쇠나 놋으로 해 달았습니다. 쌀뒤주는 보통 쌀 1∼2가마들이의 크기지만, 잡곡을 담던 뒤주는 3∼4말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쌀뒤주보다 작지요. 전북 김제시 월촌면 장화리에는 조선 후기에 회화나무로 만든 약 70가마들이 대형 쌀뒤주가 있는데 이는 옛 한국 갑부들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뒤주는 그 속에 쌀이 차 있던 비어 있던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었습니다.
1297. 바위는 검고 폭포는 길게, 정선의 진경산수화 정선은 중국의 기법을 그대로 답습한 그림은 우리 감정을 나타낸 우리 그림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산천을 두루 답사하고 그 아름다운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그림 기법을 창안하여 그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경산수화란 것인데 우리 산수를 소재로 하여 실제의 경치 그대로 그린 것으로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를 이끈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정선의 산수화는 그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인왕산의 바위는 희게 그 리지 않고 검게 그려 무거운 느낌을 강조합니다. 또 폭포는 일부러 길게 그려 폭포소리가 훨씬 우렁차고 세차게 들리도록 한 것이지요. 진경산수화라 해서 무조건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낌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조선의 초상화가 극사실화지만 사람의 생각마저 그리려고 구도와 특징을 살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296. 온돌, 사람을 잘살게 하는 것 사람에게는 ‘오욕칠정(五慾七情)’ 곧 다섯 가지 욕구와 일곱 가지 감정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욕이란 재물욕(財物慾)·명예욕(名譽慾)·식욕(食慾)·수면욕(睡眠慾)·색욕(色慾) 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수면욕은 삶에서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누구나 참을 수 있고, 식욕도 3주 단식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잠은 단 사흘만 잠을 자지 못하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웬만한 병은 잠만 충분히 자면 나을 수 있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많은 연구결과를 보면 온돌이 잠을 잘 자기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온돌은 혈액순환이 잘 되도록 하고 심리적으로도 쾌적함을 느끼게 하여 뇌에서 엔도르핀과 도파민과 같은 물질들이 많이 생기므로 면역력이나 병균 퇴치력을 강화시키고 건강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온돌은 사람의 삶에 정말 좋은 난방법입니다. 참고 : “면역력증가의 원천인 온돌”, 김성구·김준봉(국제온돌학회)
1295. 사람관계에 쓰이는 재미있는 토박이말들 사람관계에 쓰이는 재미있는 토박이말을 알아봅니다. 우선 ‘고드름장아찌’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고드름을 간장에 절였다는 것으로 비유하여 맹물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가 하면 ‘윤똑똑이’란 말은 음력의 윤달처럼 가짜로 만들어진 것을 빗댄 것으로 저 혼자만 잘난 체하는 사람을 홀하게 이르는 말입니다. ‘치마양반’은 출신이나 능력이 별로인 남자가 지체 높은 집안과 혼인하여 덩달아 행세하는 사람이고, 거리낌 없이 상말을 마구 하는 입이 더러운 사람은 ‘사복개천’이지요. 또 ‘껄떡쇠’가 있는데 이는 ‘먹을 것을 몹시 탐하는 사람’이며, 잔소리를 귀찮게 늘어놓는 사람이나 바가지를 자주 긁어대는 여자는 ‘긁쟁이’이고, 근심거리가 되는 일 또는 사람을 ‘근심가마리’로 부릅니다. 세력 있는 사람의 주위에서 총기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해가림’으로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1294. 3월 삼짇날 세시풍속과 시절음식 이야기 음력 3월 3일은 삼월 삼짇날로 설날, 단오, 칠석, 중양절처럼 양수(陽數)가 겹치는 좋은 날입니다.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지요. 또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해 상을 당하며 노랑나비를 보면 행운이 온다고 합니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하고 ‘농경제(農耕祭)’란 제사를 지내 풍년을 비손하지요. 대표적인 풍속은 화전놀이이며, 사내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거나, 여자아이들은 풀을 뜯어 각시인형을 만들어 각시놀음을 즐깁니다. 이날 선비들은 정원의 곡수(曲水, 구부러져서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올 때까지 시를 읊던 곡수연이란 운치있는 놀이를 즐겼습니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가 지은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 둥근 떡을 만드는데 그것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또 진달래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고, 녹두로 국수를 만
1293.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5세기 이전 어떤 문헌에는 18세기 조선 광해군 때 고추가 들어왔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글에는 17세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산갓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거기엔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반면 19세기 초 백과사전인 ’규합총서‘에는 고춧가루를 썼기 때문에 16세기 말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우리 겨레를 독살하려고 가져왔지만 오히려 우리 겨레 체질에 맞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고추’의 이전 형태인 ‘고쵸’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15세기 문헌들에도 나타납니다. “구급간이방”에는 “ 수레 머그라”, “고쵸 모과 달힌 믈”이라고 나오며, 훈몽자회에는 “椒 고쵸 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추는 적어도 15세기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 “‘간장’과 ‘된장’과 ‘고추장’의 어원”, 홍윤표(전 연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