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3. 조선시대 이덕무가 권한 술 마실 때 예법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쓴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선비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책《사소절(士小節)》에서 "술은 빨리 마셔도 안 되고, 혀로 입술을 빨아서도 안 된다. 훌륭한 사람은 술에 취하면 착한 마음을 드러내고, 조급한 사람은 술에 취하면 사나운 기운을 나타낸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술 마신 뒤 못된 버릇 곧 주사(酒邪)가 있는 사람은 선비일 수 없는데 사람들은 '술이 사람을 안다.'라고도 얘기하며, 술을 마시는 것에도 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시대엔 술잔을 어른께 드리고 술을 따를 때 도포의 도련이 음식물에 닿을까 보아 왼손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따랐습니다. 이런 예법은 현대에 와서 소매가 넓지 않은 옷을 입었어도 왼손을 오른팔 아래에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남아 있지요.
1262. 조선시대 아내가 남편을 부른 호칭, ‘자내’ 이 글은 16세기 이응태묘에서 나온 순한글 편지(언간)의 일부입니다. 풀어보면 “자내를 여의고 내가 살 힘이 없어서 빨리 자내한테 가고 싶으니 나를 데려가소.”이지요. 먼저 죽은 남편을 향한 아내의 애달픈 심정이 드러납니다. 얼마나 죽은 남편이 그리웠으면 빨리 데려가 달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아내가 남편을 부른 이름 ‘자내’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결형과 주로 같이 나타나는데, 이처럼 당시 부부 사이에는 대등한 호칭이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이름으로 ‘자내’ 말고도 ‘게셔, 나으리’ 따위도 쓰였습니다만 조선 중기까지는 딸이 아들과 동등하게 제사를 지냈고, 유산도 같이 물려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여성이 당당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초대합니다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출판기념 우리 문화 공연 한마당 때 : 2008년 3월 3일(월) 저녁 6시곳 : 중구 구민회관(을지로 6가 국립의료원 뒤)주최 : 김영조 시민기자 후원회 후원 : 오마이뉴스, 신나라, 교육과나눔, 또물또통합교육연구소 사뿐히 즈려밟고 오시옵소서-“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출판기념 우리 문화 잔치에 초대합니다.삼가 큰절 올리며 신명나는 잔치를 알려 드립니다.영어 몰입교육에다 숭례문 불탄 사건까지 몹시 뒤숭숭하고 우울한 나날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겁 없이 우리 것을 홀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난이 깊을수록 희망은 더욱 높은 법, 이제 우리의 희망을 가꿀 때입니다. 이제 속을 풀어내고 신나게 우리의 기를 펼칠 때입니다. 공연을 하는 이나 보는 이나 얼쑤 하나가 되었던 우리의 신명나는 가락을 살릴 때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직 우리 문화, 우리 옷, 우리 말글을 위해 이 땅 곳곳을 파고들었던 김영조 기자가 그야말로 신명나는 속풀이 책을 냈다고 합니다. 그 기자 덕에 더욱 신명났던 이들이 작은 판을 만들었습니다. 오셔서 덩실덩실 춤을 추어 주십시오. 춤추기 어려우시면 얼쑤 맞장구로
1261. 아토피피부염, 원인을 없애야 주변에는 아토피피부염으로 약을 오랫동안 쓰고 병원에 다녀도 쉽게 낫지 않은 어린이들이 있어 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에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김기봉 교수는 무엇보다도 아토피 원인을 없애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원인에는 즉석 음식, 가공 음식과 함께 건조한 환경, 자극적인 옷,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철에 나는 음식을 먹는 것, 집 안에 적당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는 것, 자극적이지 않은 천연소재 옷을 입는 것이 종요롭습니다. 또 잦은 목욕은 피하고 목욕 뒤 보습제를 발라주며, 피부 면역성을 높여줄 수 있는 냉온욕, 풍욕 따위도 좋지요. 여기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고 병을 이길 수 있다는 강한 의지와 희망이 필요한데 시골 황토집에 살면서 고친 아이도 있어서 자연 그대로가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참고 : 한의신문 제1556호, “아토피피부염, 치료된다는 희망을 가져라”
1260. 정월대보름 음식, 한방과학은 말한다 한방에서는 대보름 명절음식을 어떻게 볼까요? 우선 오곡밥은 오색이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오장육부를 조화시키고 각 체질에 맞는 음식이 골고루 섞여 있는 조화로운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찹쌀은 소화기를 돕고 구토, 설사를 멎게 하며, 차조는 비위(脾胃)의 열을 없애고 오줌을 잘 나오게 하는 동시에 설사를 멎게 하며, 차수수는 배꼽 아랫부분의 습한 기운을 없애주고 열을 내려준다지요. 또 콩은 오장을 보하고, 십이경락의 기혈 순환을 도우며, 팥은 오줌을 잘 보게 하여 부기, 목마름, 설사를 멎게 합니다. 하지만, 전통음식이라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차수수는 소화가 잘 안 되는 점을 알아야 하고, 부럼 깨물기는 이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빨이 약한 사람은 조심해야 하며, 평소 똥이 무르거나 지성 피부인 경우는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책 발간 기사 ▶ 연합뉴스 기사▶ 연합뉴스 부설 한민족센터 기사 화면
1259.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 도당굿 이야기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보면 “옛날 우리나라는 호랑이나 범에 의한 피해가 커 밤에는 집 밖으로 출입을 하기 어려웠다. 백성이 돈을 모아 제물을 마련하여 동리의 큰산에 있는 신당에서 제를 올렸는데 이때 무당이 단장하고 북을 두드리는 도당제를 올린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호랑이 섬멸작전을 펴기 전에는 이렇게 곳곳에 호랑이가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도당제를 올렸나 봅니다. 이 도당굿은 경기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굿으로 정월과 10월에 마을의 안녕과 집안의 태평을 비손하고 생업의 형태에 따라서는 풍농(豊農)이나 풍어(豊漁)를 기원하며 모두 참여하는 굿인데 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곳에 따라서 곳창굿, 성황굿이라고도 부릅니다.
1258. 태종, 숭례문 행랑 수리에 백성 대신 군사를 동원하다 태종실록 15년(1415년) 7월 17일 기록에 보면 “큰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숭례문 안의 행랑 등이 무너져 다시 고쳐 짓게 하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중신들이 무너진 숭례문 행랑을 고쳐 짓자고 임금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지난해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여 지었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찌 항구적인 대책이겠는가? 또 지금 다시 짓자면 어떤 사람을 부릴 것인가?”라며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태종은 처음 지을 때 감독자 모두를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가 석방한 뒤 그대로 공사 감독을 맡게 하고 백성이 아닌 군사들을 동원했습니다. 여기엔 화약 무기로 싸우는 화통군(火㷁軍) 400명 등이 주로 참여했고, 토목·건축을 담당했던 선공감(繕工監)의 목수·석수·대장장이가 함께 했습니다. 백성 앞에서 혹독한 임금으로알려진 태종도 이러한데 지금 남대문 복원을 국민성금으로 할 일일까요?
1257.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드디어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가 지난 16일 토요일에 나왔습니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하여 7달 동안 고치고 다듬은 끝에 나온 것이지요. 서점에는 수요일(20일)쯤 나갈 예정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특히 추천의 말을 써주신 국립국어원 이상규 원장님,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 이생강 선생님, 독일 함부르크 한인회 신부영 회장과 책을 정성을 담아 내주신 이지출판 서용순 사장님께 깊이 절을 드립니다. 우리 문화에는 이름다움과 따뜻함과 슬기로움이 함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문화가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느끼고 즐겨야 하는 삶 그 자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모두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에 빠져 보시면 어떨까요?
1256. 숭례문과 남대문, 이름에 얽힌 오해 조선시대 한양의 성곽 중 4대문의 이름을 설계자 정도전은 직접 방향을 가리키는 말인 동서남북 대신 음양오행에 따라 그것과 의미가 같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썼습니다. 그래서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는 1933년 8월 9일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공포하여 보물 1,2호를 숭례문대신 남대문으로, 흥인지문 대신 동대문이란 이름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남대문, 동대문은 일제가 격을 낮춰 부른 이름이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해 보면 '남대문', '동대문'과 같은 이름도 이미 태조 때부터 관용어법의 하나로 흔히 쓰였습니다. 또 ‘경성(京城)’이란 이름도 "선조실록" 30년 1월 27일 조에 이미 나오는 이름이어서 일제 강점기 때 새로 지어진 이름이 아닙니다. 일제 왜곡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이런 오해는 없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