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9. 영어 잘하는 나라가 못 산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영어 수업 논란과 관련해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따위를 예로 드는 모양입니다만 그들은 원래 영어가 모국어인 민족이어서 예로 들 수 없습니다. 모국어가 따로 있지만 주로 근세 이후 영어를 공용어로 쓰기 시작한 나라는 필리핀, 미얀마, 인도, 싱가포르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싱가포르를 빼면 모두가 가난한 나라들인데 이를 보면 오히려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일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는 이렇게 억지 정책을 고집하고 있지만 이들이 진정 나라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이래선 안 될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벼슬아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훈민정음을 창조한 것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백성 사랑입니다.
1248. 인수위의 영어교육 정책은 부의 세습을 위한 것 “국어는 한국인이니까 한국에서 할 수 있다. 수학은 참고서 달달 외우면 빈부귀천 없이 엇비슷한 성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영어는 다르다. 농어민, 노동자, 강북민, 지방민, 비정규직, 도시서민, 영세자영업자의 자식들은 절대로 다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온 부잣집 자식들의 영어능력을 따라갈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평가 기제로서의 영어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부귀를 대물림하고 국민 다수를 따돌릴 수 있는 마법 주문, 영어!” 위는 데일리서프라이즈라는 인터넷신문에 문화평론가 하재근 씨가 올린 글입니다. 그는 인수위의 영어 정책이 한국사회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한국인은 영어능력만 기이하게 비대해져 지식경쟁력이 약화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인수위 사람들은 그들만의 부귀 세습을 위해 국민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247. 소나무 자를 때 소나무 신령에게 위령제를 지냈다 지난해 11월 29일 문화재청⋅산림청 주최로 강릉시 성산면에서는 광화문 복원에 쓸 금강소나무를 자르기에 앞서서 산신과 소나무의 영혼을 달래고 안전작업 비손하는 위령제를 열었습니다. 위령제는 잘라질 소나무 신령 앞에서, 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비는 뜻으로 하는 얇은 종이를 불태우는 ‘소지(燒紙) 매기’와 위령제를 하고 강릉 단오제보존회 산신굿 예능보유자가 산신과 나무 영혼을 달래는 굿을 했습니다. 특히 나무를 자르는 행사는 손도끼로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치면서 자를 나무의 뿌리 근처 껍질을 벗기는 “근부박피”,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치면서 뿌리 부근에 “산”이란 도장 찍기(극인), 재래톱으로 먼저 자른 뒤 기계톱으로 자르는 “벌도” 따위의 행사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자연을 그저 수탈의 대상만이 아닌 더불어 사는 이웃으로 본 우리문화의 철학이 들어 있음입니다.
1246. 어진 그리기 거부한 조영석, 벼슬이 오르다 조영석은 조선 후기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로 정선·심사정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영조실록 24년(1748년) 2월 4일자에는 “선정전에 나아가 봉심을 마치고서 조영석에게 모사를 하교했으나 듣지 않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영조임금이 어진을 그리라 했지만 조영석은 거절합니다. 신하와 임금 사이에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절대군주의 시절 감히 임금의 명을 거절하다니 더구나 조영석은 그 13년 전에도 세조 영정을 모사하라는 명을 받지 않아 파직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신들은 조영석의 죄를 물으라 했지만 영조는 더는 말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의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다음 달 벼슬을 정5품으로 올려주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조영석도 대단하지만 영조는 참 슬기로운 임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245. 대학이 실패한 ‘영어로 강의’, 초등학교에 도입? 새 정부 인수위원회가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여 말이 많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영어로 수업하면 좋을까요? 최근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는 대학들이 있습니다. 한 대학 한국사학과는 영어에 없는 개념을 설명하려고 또 학생들 사이 영어 실력 차이와 교수들의 영어강의능력 부족 때문에 결국 한국어로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강의가 그저 읽는 것으로 전락하거나 아예 영어회화수업으로 변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학도 이럴진대 초등학교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또 영어가 꼭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모두에게 영어를 하도록 한다면 이에 따라 쓸데없는 ‘영어 배우기’에 정신을 파느라 정작 민족 정체성이나 자부심은 포기해야만 하며, 또 다른 사교육 열풍으로 온 나라는 난리통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1244. 조선시대 옷으로 나타낸 신분 조선시대에는 한복 색깔로 자신의 처지를 나타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는 다홍치마, 노랑저고리, 갓 결혼한 새색시는 다홍치마, 연두저고리, 결혼한 부인은 남치마, 옥색저고리를 입었지요. 그런가 하면 저고리 소매가 남색이면 아들이 있다는 표시였고, 자주색 고름을 달면 부부가 금실 좋게 해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왕가나 명문세도가는 금박무늬를 새길 수 있었는데 오늘날 정신없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럭셔리(luxury)'일까요? 그러나 임진왜란 뒤 신흥 양반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일반인들도 금박무늬를 옷에 새길 수 있게 됐습니다. 사진의 사규삼은 정승의 후손이 입었던 것인데 왕실에서 바느질을 하던 침선장이 지은 것입니다. 그 증거로 왕실의 금박장은 “부귀다남(富貴多男)”이란 글자를 찍을 때 '富' 자의 위 꼭지를 찍지 않았다고 합니다.
1243. 박연의 혼천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있다 조선 태조 4년 곧 1395년에 검은 석판에 새긴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아무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풀밭에 내팽개쳐진 채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에 창경궁의 명정 전 추녀 밑에서 전상운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이 각석이 중요한 문화재임을 알아봐 다행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귀중한 문화재가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이렇게 우리 문화재는 모든 국민이 사랑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음을 물론 남의 나라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현재 박연이 그린 혼천도(渾天圖)는 일본 국회도서관에 있는데 “한글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린 나일성 교수가 찾아내 종이에 그려냈습니다.
1242. 조선왕조실록, 쉬운 인터넷 번역본으로 볼까요? 요즘 드라마는 사극이 인기를 끄는데 , 그리고 이 한창 방영 중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가 “정조를 괴롭히는 화완 옹주는 언제 죽었을까?”, “ 김처선은 어디 김씨이며, 어떻게 죽었을까?”, “충녕대군은 언제 양녕대군 대신 세자로 책봉되었을까?” 같은 궁금증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지요. 하지만, 이제 그런 일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우리에겐 번역본 그것도 인터넷에서 쉽고 간단하게 검색할 수 있는 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지난해 말부터 실록 한글번역본·원본 이미지는 물론 한문으로 된 원문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문장부호를 붙여준 한문표점본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입체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쉬운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으로 조선 역사를 들여다 볼까요?
1241. ‘박수치다’보다는 ‘손뼉치다’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손과 관련된 말은 토박이말에 참 많습니다. 손으로 대중을 잡아 재는 손가늠과 손어림 그리고 손짐작, 망가뜨리는 일을 손에 익혀버린 손버릇, 손을 펴서 휘저으며 거절하는 손사래, 손으로 남을 치는 손찌검, 사랑을 나누려고 내미는 손길, 손으로 건드려서 일어나는 손때, 손으로 만져서 솟아나는 손맛, 손으로 이루어내는 모습인 손매, 일을 치러나가는 솜씨가 날렵하면 손바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칭찬할 때 말이 아닌 손바닥과 손가락을 합친 전체의 바닥을 치는 것을 보통 ‘박수친다’고 하는데 여기서 ‘박수(拍手)’라는 말은 바로 "환영이나 축하 따위의 뜻으로 손뼉을 침"이란 뜻이 있는 한자말입니다. 따라서 ‘박수치다’라는 어색한 말보다는 “손뼉치다”라는 토박이말을 쓰면 더 좋지 않을까요? 참고 : 김수업의 우리말 사랑 이야기 “말꽃타령”, 지식산업사
1240. 우리나라의 한지, 중국에서 최고로 쳤다 예전 중국인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 종이를 ‘계림지(鷄林紙)’, ‘고려지(高麗紙)’, ‘조선지(朝鮮紙)’로 부르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 가는 선물이 ‘종이’와 ‘청심환’이었다는 데서 우리 종이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때의 중국 사람들은 우리 종이의 질이 비단으로 만들었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는데, 명나라 "일통지(一統志)" 때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확인한 기록이 보인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 서명웅이 지은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를 견줄 때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는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서 질겨지며 더욱 고르고 매끄러워졌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적고 있어 한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