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1. 고구려 사람들의 장사지내는 풍속 중국 당(唐)나라의 장손무기(長孫無忌) ·위징(魏徵) 등이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수서(隋書)≫ 고려(高麗:고구려) 조에 보면 고구려 후기의 장사지내는 풍속이 나오는데 삼년상을 지내는 것은 고구려 때와 지금이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한 뒤 집안에 빈소를 만들었다가 삼년 뒤에 장사를 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데 추운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장사지낼 때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보낸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런 풍속은 전남 진도의 장사지내는 풍습과 비슷합니다. 또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에 간다.”라는 기록도 보입니다. 그때는 죽은 사람의 물건을 같이 묻어주는 것(부장)이 아니라 다투어서 가져갔었군요.
1190. “가격이 저렴하다” 대신 “값이 싸다”라고 해주세요 사람들은 흔히 “가격이 저렴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값이 싸다”라고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말은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입니다. 쉬운 말을 써서 무식쟁이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바른말일 것입니다. 법률가가 어려운 법률용어를 쓰고, 의사가 진료기록부를 영어로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일 뿐입니다. 또 두렵고 자신이 없어서 자꾸 말을 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한자말을 쓰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수업 우리말대학원장은 외래어나 한자말을 거의 쓰지 않고 토박이말로만 글을 씁니다. “서론·결론” 대신 “들머리·마무리”, “탁월한” 대신 “뛰어난”, “유명한” 대신 “이름난”, “고찰했다” 대신, “살펴보았다”, “서술했다” 대신 “풀이했다”, “라이벌” 대신 “맞수”, “백미러” 대신 “뒷거울”, “핸디캡” 대신 “흠”, “타임캡슐” 대신 “기억상자”, “적립금” 대신 “콩고물”이라고 쓰면 될 일입니다.
1189. 첫눈 내린 날, 영조임금의 글씨 서설을 봅니다 어제는 첫눈이 내렸습니다. 그 눈이 내년 농사의 풍작을, 모든 국민의 행복을 알리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첫눈을 보고 영조임금이 쓴 “서설”이라는 글씨를 들여다 봅니다. 영조의 어필은 4언과 5언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 행서로 쓰였습니다. “상서로운 눈이 내려 풍년을 알리니 내년 농사가 잘될 것(瑞雪驗豊 明農登熟 仍此有祝)”이라는 내용을 담은 글 가운데 “서설(瑞雪)” 두 글자를 따서 쓴 글자를 보면 영조임금의 힘이 느껴집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나는 첫눈, 서설을 맞으며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라는 시를 읽습니다. 그리고 첫눈 위의 백자 달항아리를 생각합니다.
1188. 태왕사신기에 나오는 개마무사 이야기 고구려가 동북아를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가 된 데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 덕분입니다. 그런데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태왕사신기”에는 “개마무사대”가 나옵니다. 바로 그 개마무사가 고구려를 강성하게 할 수 있었던 종요로운 것의 하나라고 합니다. 개마무사는 “중장기병”으로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입니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리덮은 갑옷을 입었으며,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었습니다. 또 말의 얼굴에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로 갑옷을 입힙니다. 개마무사는 오늘날의 탱크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1187.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1779년 8월 3일 새벽 정조는 효종능과 세종의 영릉을 찾으려 창덕궁을 나섰습니다. 어렵사리 강을 건넜을 때 길가에 빼곡히 늘어선 백성을 보고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이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하겠다.” 이 말은 숙종의 ‘주수도(舟水圖)’를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곧 1675년 숙종이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어진 이후에 임금이 편안하다”며 물과 배 그림을 그리게 했던 일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숙종은 물을 신하로 비유해 ‘보필의 논리’를 이야기했지만, 정조는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을 수도 있다.”라고 하여 임금은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조와 숙종 두 임금은 똑같은 물을 놓고도 이렇게 다른 생각을 했지요. 참고 : 정조가 세종을 만났을 때,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1186. 일본에 술 빚는 법을 가르쳐준 백제 “술을 빚을 줄 아는 사람으로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으로 스스코리(すすこり)라는 사람이 왔다. 이 스스코리는 어주(御酒)를 빚어서 바쳤다. 그때 천황은 그가 바친 어주를 마시고 기분이 유쾌해져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스스코리가 빚어 만든 술에 나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편안해지는 술, 웃고 싶어지는 술에 나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위는 오노 야스마로(太安麻呂)가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의 부름을 받아 썼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신화·전설과 역사를 기록한 책 ≪고사기(古事記)≫ 응신왕조(應神王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스스코리는 백제의 왕인(王仁)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갈 때 같이 갔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스스코리라는 백제 사람이 일본에 건너와 누룩으로 술 빚는 방법을 전해주었다는 것인데 이를 보면 백제가 일본에 여러 가지 문화를 전파했는데 그 가운데 술도 들어 있었습니다. 참고 : "부여의 전통음식 조사연구 보고서", 부여군(한국전통문화연구소)
1185. 조선시대의 팔도명물은 무엇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성종 9년(1478)에 양성지 등이 펴낸 지리책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보완하여 성종임금의 명에 따라 1481년 노사신, 강희맹, 성임, 서거정 등이 펴낸 지리서입니다. 이 책은 조선팔도의 지리·풍속을 기록한 55권 25책의 활자본 책인데 그냥 ≪여지승람(與地勝覽)≫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남아있지 않고, 지금 전해지는 것은 광해군 때인 1530년 목판본으로 다시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인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가 보는 것처럼 재미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당시의 조선팔도 특산물을 보면 영광 조기를 비롯하여 붉은 게(자해:紫蟹)로 기록된 영덕 대게, 풍기 인삼, 담양 대나무, 상주 감 따위가 있습니다. 또 제주 귤도 등장하는데 금귤, 산귤, 동정귤, 왜귤, 청귤의 다섯 가지가 있었다고 하지요. 조선시대의 특산물들은 지금껏 특산물로 유명하니 대단하기만 합니다.
1184.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쟀던 풍기 세종 때 이후 측우기로 비가 온 양을 재고 강과 개천의 수량을 재는 등 농업기상학이 발달했는데, 이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세종임금이 힘을 쓴 까닭입니다. 농사에는 비와 함께 바람도 종요로운 변수였기에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고자 풍기대(風旗臺)를 만들고 그 위에 풍기(風旗)를 세웠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유물로는 보물 제847호 경복궁풍기대, 보물 제846호 창경궁풍기대가 있습니다. 창경궁풍기대는 아랫단의 높이가 91센티미터, 위 8각 기둥의 높이가 135센티미터, 전체 높이는 228센티미터입니다. 풍기대에 관해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대궐 가운데에는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예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으로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놓고, 거기에 풍기죽(風旗竹)을 꽂아 높았다"라고 기록되어있지요. 또 에 화강석 풍기대 그림이 있습니다.
1183. 문학이 아니고 “말꽃”이어야 합니다 우리말교육대학원장이며, 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을 지낸 김수업 선생은 토박이말 사랑이 남다릅니다. 특히 “문학”이란 낱말이 서른 해 동안 목에 가시처럼 걸려 괴로워하다가 “말꽃”이란 말을 생각해 내고는 참 기뻐합니다. 선생은 학문이 아닌 “문학”에 왜 배울 “학(學)” 자를 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선생은 찔레꽃, 살구꽃, 복숭아꽃은 물론 불꽃, 눈꽃, 꽃구름, 꽃수레까지 우리 겨레는 아름답고 종요로운 것을 “꽃”이라 불러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문학”이 아닌 “말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학”이란 말도 원래 있던 말이 아니고 근대에 새로 만들어진 말인데 뜻도 맞지 않는 “문학”은 내버려 두고 뜻이 잘 맞는 “말꽃”에는 왜 시비를 거는지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똑같이 새로 만든 말인 문법*삼각형*형용사는 내버려 두고, 말본*세모꼴*그림씨만 이상하다고 트집을 잡아 내쫓고 만 것과 같은 이치라고 얘기하지요.
1182. 자금성보다 작지만 부족함이 없는 경복궁 며칠 전 취재차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동행한 한 사람이 “북경에 오면 자금성은 꼭 보아야 한다. 자금성은 경복궁이 비교되지 못할 만큼 대단하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누구나 자금성을 보면 그 큰 규모에 놀라 경복궁은 자금성의 부속건물 수준으로 생각해 자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 크기로만 견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경복궁은 전통적인 조선인의 미관과 세계관을 조화롭게 표현한 건축물인데 검소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하지 않은 궁궐이라고 말합니다. 자금성은 엄청난 크기, 엄격한 대칭, 깎아지른직선으로 삼엄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경복궁은 열린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궁궐로 이끌어오고, 어디에서나 문을 열면 그 문을 통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 것의 올바른 가치를 아는 것이 참 종요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