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 내일은 칠석, 세시풍속을 알아봅니다. 칠월칠석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거나 우물을 퍼내어 깨끗이 한 다음 시루떡을 놓고 식구들이 병 없이 오래 살고 집안이 평안하게 해달라고 칠성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처녀들은 견우성와 직녀성을 바라보며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것을 걸교(乞巧)라 했지요.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놓고 다음날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바느질 솜씨가 좋아진다고 믿었습니다. 또 칠석 때는 장마에 축축해진 옷가지와 책이 곰팡이가 설지 않도록 바람을 쐬는 거풍(擧風)이란 풍속도 있었는데 이것은 햇볕을 쐬는 포쇄(曝曬)라는 풍속과 비슷한 일로 보입니다. 서당 소년과 선비들은 견우성와 직녀성을 두고 시를 짓거나 공부 잘할 것을 비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1113. 조선시대의 옷, 철릭을 아시나요? 철릭은 저고리와 치마를 따로 만들어 허리에서 붙인 특이한 형태로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양인데 겉옷인 포의 일종입니다. 곧은 옷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교차시켜서 앞을 여미었고, 단령 밑에 입는 받침옷으로 늘 입었습니다. 당상관(堂上官)은 남색을, 당하관(堂下官)은 홍색을 입었지요. 철릭은 융복(戎服)이라 하여 주로 무신이 입었지만 문신도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나 전쟁이 나서 임금을 궁궐 밖으로 따라갈 때에는 입었습니다. 철릭 가운데 “요선철릭”은 허리에 여러 겹의 주름을 잡아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철릭은 첩리(貼裏·帖裡·帖裏), 천익(天翼·天益), 철릭(裰翼·綴翼) 등으로 쓰기도 했는데 원래 철릭이 토박이말인 것을 한자로 쓸 때 “릭”자를 대체할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만 빌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1112.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는 진도 씻김굿 우리의 전통 민속은 종합예술인 굿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전국의 수많은 굿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된 것은 현재 진도씻김굿을 비롯해서 동해안별신굿, 서해안배연신굿및대동굿, 경기도도당굿, 서울새남굿,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따위가 있습니다. 이중 진도 씻김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로 전남 진도에 전승되는 것인데 이승에서 풀지 못한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고, 즐겁고 편안한 세계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이며, 원한을 씻어준다고 해서 씻김굿이라 부릅니다. 다른 지방에서 하는 씻김굿은 무당이 불 위나 작두의 날 위를 걷는 등의 과정이 있으며, 보통 궁중복을 입고 무당 자신이 직접 죽은 사람과 접합니다. 그러나 진도씻김굿은 춤과 노래로 신에게 빌고, 하얀 소복 차림이며 죽은 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죽은 자와 접하게 한다는 점이 특징이지요.
1111. 오늘은 광복절, 일본말 찌꺼기 버리셨나요? 오늘은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한 지 62돌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진정한 광복을 맞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본말 찌꺼기를 여전히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잘못된 일본말 찌꺼기를 쓰는 것은 일본정치인들이 여전히 역사왜곡을 하게 만드는 빌미가 아닐까요? 음식점에 가면 “닭새탕”이란 뜻으로 해석되는 “닭도리탕(닭とり탕)”이 차림표에 버젓이 쓰여 있으며, “가득 채우다”라는 뜻으로 “만땅(滿-tank)”이란 엉터리 말을 쓰고, "얼룩, 오염, 흠"이란 뜻인 "스덴(stain)"을 “스테인리스(stainless)” 대신 씁니다. 또 영어를 지독히 못하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빵꾸(punchure), 사라다(サラダ), 츄리닝(training)을 쓰는가 하면 축제, 낭만, 히야시(ひやし), 곤색(こんいろ) 같은 찌꺼기를 쓰는 모습은 참 안타깝습니다.
1110. 오늘은 말복, 소금 뿌린 수박화채를 드셨나요? 우리 겨레는 예부터 수박화채에다 소금을 뿌려 먹었으며, 복숭아에 소금을 쳐서 끓여 받친 즙으로 지은 밥(반도반:蟠桃飯)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여름철 음식에 소금을 쓴 것은 지나친 체열의 손실과 땀의 과잉 분비로 인한 체액 손실 및 나트륨 손실이 오는데 이에 따라 전해질의 혼란이 올 수 있으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해 소금을 보충하는 조상들의 슬기로움입니다. 또 여름엔 땀으로 체내의 질소가 많이 빠져나가 단백질 보충이 필요한데 콩국수는 이에 적당한 음식이지요. 한편 여름철은 청량음료의 남용으로 식욕이 부진하고, 소화 장애가 심해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식초가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또 식초는 체질이 산성화되는 것을 예방해주며, 여름철 음식 변질에 따른 식중독도 미연에 막아주고, 물갈이로 인한 배탈 설사도 예방해 주거나 손쉽게 치료해 주는 구실까지 해줍니다.
1109. 일본서기의 역사 2600년에 맞추려 단군을 신화로 꾸몄다. “人間好事甘塵累 / 사람들은 일을 좋아하니 티끌까지 달게 여기누나 物外閒情臥草堂 / 물질 밖의 한가로운 정은 초당에 누워있네.” 이 뜻은 사람들은 일 벌리는 것을 좋아하여 티끌까지도 달다고 생각한다며 나무라고, 자신은 물질을 초월하여 한가롭게 초가에 누워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글은 대전에 사시는 94살의 최봉수 선생님이 쓰신 한시의 일부입니다. 선생님은 아직도 정정한 채 돋보기도 없이 작은 글자도 읽으시고, 보청기도 쓰시지 않습니다. 늘 원고지에 글을 쓰시고,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십니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즐길 것도 없으니 그저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로 글만 쓰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은 일본서기의 역사가 2600년인데 일제가 그에 맞추려고 단군을 신화로 거짓 꾸민 것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며 개탄하십니다.
1108. 세종대왕은 사대주의자였다? 한 학자는 “세종은 명나라에 지성으로 사대를 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세종이 정말 사대주의자일까요? 세종은 중국 황제가 죽자 복을 사흘만 입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도 군신의 의리를 들어 27일을 입었고, 말 3만 마리, 소 1만 마리를 보내라는 요구도 신하들은 반대 했지만 “조선은 예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하여 정성껏 사대하였다.”라며, 수용합니다. 그렇게 보면 분명 사대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통한 효과로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고,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었으며, 명에 복속한 여진족을 정벌할 때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효과는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명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은 훈민정음을 오랑캐 나라의 하찮은 글자라며 무시했을 수도 있지만, 세종의 지성사대에 속았을 것입다. 세종임금은 정말 뛰어난 전략가입니다.
1107. 축제는 잔치나 축전으로 바꿔 써야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축제’를 만납니다. 그런데 “축제(祝祭)”는 그대로 풀면 ‘축하의 제사“란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축하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축제는 일본에서 마을마다 행해지는 고유의 전통적인 ’마쓰리(まつり)‘가 그 기원입니다. 마쓰리가 시작되면 마을은 온통 잔치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이 때문에 각 지방 고유의 특징을 지닌 마쓰리는 좋은 관광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제(祭)” 자를 “제사(祭祀)”나 “기우제(祈雨祭)”처럼 죽은 조상이나 하늘에 지내는 엄숙한 의식에만 써왔습니다. 그 대신 우리나라는 “잔치”나 “축전(祝典)”이란 말을 썼습니다. 엄연히 우리말이 있는데도 남의 나라 말을 그것도 정확히 뜻이 맞지 않는 말을 쓴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까요?
1106. 쪽찐머리 뒤에는 머리꾸미개 뒤꽂이 조선시대 쪽찐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외의 머리꾸미개(장신구)를 “뒤꽂이”라고 하는데 끝이 뾰족하고 다른 한 끝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이 딸려 있어 뾰족한 곳을 쪽에 꽂아 장식합니다. 재료나 장식의 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일반에서 사용한 뒤꽂이는 과판이라 하여 국화 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 연봉이라 하여 막 피어오르는 연꽃 봉오리를 본떠 만든 장식이 달린 것을 썼습니다. 이 밖에도 매화 ·화접 ·나비 ·천도(天桃) ·봉(鳳)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이 있고, 산호 ·비취 ·보석 ·칠보 ·파란 진주 등으로도 꾸몄지요. 장식과 함께 실용적인 면을 겸한 것으로는 귀이개 ·빗치개·뒤꽂이 등이 있는데 빗치개는 가르마를 갈라 머리를 정리하는 데 쓸 뿐만 아니라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였고,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도 썼습니다. 원래는 귀지를 파내는 귀이개를 꾸미개로 써서 쪽찐머리에 꽂기도 합니다.
1105.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 장영실은 관청의 노비였는데 그의 뛰어남을 보고 세종이 특별히 발탁한 덕분에 많은 발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발명한 것 중에는 이천, 김조와 함께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도 있는데 보물 제845호이며,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오목한 시계판에 시각을 나타내는 세로선 7줄과 계절을 나타내는 가로선 13줄을 그어서 시간과 24절기를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앙부일구는 대궐 안과 함께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북쪽에 있던 다리인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여서 그 의의가 큽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동물 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다만, 여주 영릉에 전시한 복원품은 12지신 그림이 없고 글씨만 쓰여 있어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