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 고양 긴꼬리닭 천연기념물 된다.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한에는 꼬리가 가는 아름다운 닭이 있는데 길이는 5척쯤 된다.(韓傳 出細美鷄 其美皆五尺餘)”라는 기록이 있으며, 명나라 이시진이 엮은 본초강목 금부 권48에 “조선에는 꼬리가 3~4척 되는 긴꼬리닭이 있는데 맛과 살이 다른 닭보다 뛰어나다(朝鮮 一種長尾鷄 尾長三四尺 遼陽一種食鷄 味俱肥美 大勝諸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헌을 보면 긴꼬리닭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길러온 것으로 보입니. 이희훈 씨는 고양 긴꼬리닭을 27년 동안 육종해왔는데 현재 2년생 이상 된 꼬리의 길이가 보통 1m로 되었습니다. 이에 농촌진흥청은 고양 긴꼬리닭 유전자를 연구한 결과 한국 재래종으로 추정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으며, 문화재청은 점차 사라져 멸종되어 가는 ‘고양 긴꼬리닭’을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였습니다.
1065. 보부상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같이 이르는 말 옛날엔 보부상이라 하여 시장을 중심으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 역할을 했던 전문적인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 수천 명의 부상들이 동원되어 식량과 무기를 운반·보급하고, 직접 전투에도 가담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는 등 나라를 위한 일에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보부상(褓負商)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으로 나뉩니다. 보상은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 따위를 판매했는데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팔았기에 ‘봇짐장수’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따위의 가내수공품을 주로 팔았으며,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기 때문에 ‘등짐장수’라고도 합니다. 요즘 보부상이 아닌 부보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064. 고려 시대 임금, 평상시엔 흰 모시 도포를 입었다. 중국 송나라의 서긍이란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은 고려의 서울 송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평상시 쉴 때에는 검은 건[烏巾]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고려봉사선화도경 제7권 왕복) /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모시 노랑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0권 부인)” 고려시대엔 임금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검은 건에 흰 모시 도포를 입었다는 것과 왕가에서부터 백성의 아낙네까지 여자는 똑같이 흰모시 저고리, 노랑치마를 입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옷으로 신분의 귀천을 표시하지 않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1063. 재물을 마구 긁어모으는 짓은 걸태질 세상에는 수천억 원의 부자가 있는가 하면 하루 끼니도 잇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수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부자가 1억 원의 재산도 없는 사람보다 능력이 천배가 뛰어난 것은 아닐 테지요. 정상적으로 번 돈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고, 탈세를 해가면서 번 돈을 자식에게 상속하려 혈안이 된 재벌 우두머리를 보면 그들은 ‘걸태질’을 하고 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으며, 염치를 돌보지 않고 재물을 마구 긁어 들이는 짓을 ‘걸태질’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락없이 그 재물을 사회에 환원할 줄도, 이웃과 나눌 줄도 모릅니다. 이와 함께 지방 관리나 토호들이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이는 짓은 ‘글겅이질’입니다. 이것저것 휘몰아 먹는 것은 ‘걸터먹다’라고 하는데 모두 추합니다. 걸태질, 글겅이질이 없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참고 :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풀이사전”, 박남일, 서해문집
1062.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서 생긴 농악이란 말 풍물굿을 ‘농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농악은 일본 제국주의의 농업 수탈정책의 하나인 농업 장려운동으로 원각사의 협률사라는 단체에서 처음 부르기 시작했지요. 농악이란 말을 풀이하면 '농민의 음악'이란 뜻이고, 원래 풍물굿이 농경사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농악’은 일본 탈놀이인 ‘능악(能樂, 노가꾸)을 본떠서 만든 말로 일제가 벌린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라고 합니다. 일제는 우리의 민속놀이를 말살하려고 농업 장려의 목적에 한해서만 풍물굿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가 '농악'이란 이름으로 신청을 해야만 허락했기 때문에 굿하는 단체들이 농악이란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고, 8ㆍ15 해방 이후 많은 학자들이 국악이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따라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농악이란 말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061. 중국 옛 문헌에 나타난 백제인과 왜인 지난 2005년에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인과 복식”이라는 전시가 있었습니다. 거기엔 6세기 중국 양(梁)나라 시대에 제작된 사신도(使臣圖)인 양직공도(梁職貢圖)가 있었지요. 그 양직공도는 각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당초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국 사신의 모습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백제 사신의 그림이 있어 백제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 양직공도에는 왜 사신의 그림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사신은 바느질도 하지 않은 옷감 조각을 두르고, 신도 신지 않은 초라한 모습입니다. 화려한 백제 사신에 비교할 정도가 아니지요. 한반도에 왜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은 당시 일본이 그렇게 강대했다면 왜 사신의 옷차림이 초라했는지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1060. 만주족을 아십니까? 만주족을 기억하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숙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여진 따위의 만주족이 옛날엔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북방기마민족으로써 한때 중국의 한족(漢族)을 지배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어 이제 그 흔적조차도 없어질 정도입니다. 얼마 전 연변대학교 김병민 총장과 대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연변대학교는 동북3성에서 이름난 명문대학이며, 교수의 75%가 조선족일 정도입니다. 대담 중 김 총장은 “만주족은 말에서 내리면서 이미 끝났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중의법’입니다. “말”은 만주족이 타던 말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언어 “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만주족은 말에서도 내렸지만 그들의 언어를 잊은 탓에 자신들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조선족은 한국어를 잊지 않은 탓에 아직도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1059.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갔던 길을 따라가 보자. 우리 겨레는 일제강점기 동안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피지배 기간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독립투쟁을 했지요. 지금 대한민국의 헌법을 보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임시정부가 고통을 받으며 갔던 길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심지어는 엉뚱한 건물을 임시정부 청사라고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구요. 그래서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봉원 이사가 이번에 임시정부가 간 길을 따라가는 여행 일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두 번이나 답사하고, 아무도 몰랐던 임시정부 행적을 찾아내기도 한 전문가입니다. 지난해는 바로 그 여정을 따라가는 소설 “국새”를 써내기도 했습니다. 오는 8월 3일 인천공항을 떠나 14일 새벽에 돌아오는 27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여정에 동참해보면 어떨까요? 임시정부 따라가는 여정 ▶ http://cafe.daum.net/hyosasa
1058. 한국의 반고흐, 최북을 아십니까? 최북은 조선 후기의 화가입니다. 주요작품으로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漁圖)’ 따위가 있습니다. 호생관이라는 호는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것인데 최초의 직업화가였다고 합니다. 자는 ‘칠칠이’이며, 이름의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지은 것입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했고,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습니다. 최북에게 어떤 권력자가 와서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합니다. 그런데 강요받는 게 싫었던 최북은 문갑 위에 있는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서 자기 눈을 치르고서는 차라리 자해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지 않겠다고 외쳤습니다. 칠칠이는 그 뒤 애꾸가 돼서 안경을 사도 한 알만 샀다고 합니다. 최북은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한국의 반고흐로 불립니다.
1057. 중국의 사서들이 고구려를 헐뜯은 까닭 ‘후한서(後漢書)’나 ‘삼국지(三國志)’ 등 중국의 사서들에는 부여나 예맥, 옥저 사람에 대해서 ‘체격이 크고 굳세고 용감하며, 우직하고 건실하며 근엄하고 후덕하다. 또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라고 후하게 평가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서들에서 중국인들은 이 부여나 예맥, 옥저의 후손들인 고구려 사람들을 “성질이 포악하고 성급하며 싸움 잘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라고 써 놓습니다. 또 지금도 공연하는 중국의 전통예술인 경극에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는 무서운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수와 당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했지만 번번이 패퇴한 그들이 ‘오죽했으면 고구려를 그렇게 표현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동북공정에서 우기는 것처럼 고구려 역사가 자기네 것이라면 자신들의 오래된 사서는 물론 전통예술까지 그렇게 표현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