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민속놀이의 맥을 끊어버린 조선총독부 우리나라엔 예부터 전해오던 많은 민속놀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지방마다, 마을마다 또 때에 따라 모두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민속놀이가 이젠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의 문화 말살 정책과 70년 대 이후 산업화에 따른 결과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온 나라의 민속놀이를 조사하여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냅니다. 그 이후 풍물굿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민속놀이를 못하게 했습니다.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이 낸 “경상북도의 세시풍속과 민속문화”를 보면 1930대부터 해방 때까지 사이에 일제에 의해 중단된 민속놀이들이 많습니다. 안동 차전놀이, 의성 기마싸움, 포항 월월이청청, 경산 자인 팔광대놀이 등은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다가 겨우 80년대 이후 복원되었고, 울진군 놀싸움 등은 아예 맥이 끊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참고 : “경상북도의 세시풍속과 민속문화”, 경상북도ㆍ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1023. 석굴암, 그 속엔 신라인의 과학이 있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 첫 총독 테라우찌는 식민지의 통치와 재산관리를 위해서 문화재들에 대한 치밀한 조사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해체, 보수공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 공사는 일본인 문화재전문가인 야나기 무네요시조차도 비판했는데 오히려 극심한 누수현상이 생겨 끊임없이 보수를 하게 됩니다. 그 보수는 일제강점기 때뿐만 아니라 3공화국 시절에도 이어집니다. 일제는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 밑에 있는 두 개의 샘물 때문에 결로가 생긴다며 이 샘물을 배수로를 만들어 밖으로 빼내버렸습니다. 이태녕 박사는 이런 보수공사가 오히려 온도가 낮아야할 바닥돌의 온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요석부분의 온도가 낮아져 결로가 생겼다고 지적합니다. 진짜 과학이란 자연현상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것이 바탕이 된다는 진리가 석굴암엔 들어있었습니다.
윷판에는 ‘종정도(從政圖)’ 또는 ‘승경도(陞卿圖)’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도판은 큼직한 종이에 종9품부터 영의정까지 내외직의 모든 관직 즉 참봉 만호 같은 하위직에서 판서 대제학 병사 수사 등 고위직을 망라하여 문관 무관을 구별치 않고 적은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 도나 개가 나오면 좋지 않은 벼슬을 받게 되며 윷이나 모가 나오면 좋은 자리를 받습니다. 벼슬살이를 계속하는 동안 좋은 말밭을 걷게 되면 고속 승진이 보장되어 영의정의 자리를 누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나쁜 말밭을 걷게 되면 유배를 가기도 하고 파직을 당하기도 하면서 변변치 못한 잔반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또 낮은 등급으로 내려앉거나 사약을 받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종정도를 이용해 윷놀이를 벌이면서 모든 관직을 외우게 되고 관직생활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수양의 정신을 되새기게 됩니다.
윷판에는 ‘종정도(從政圖)’ 또는 ‘승경도(陞卿圖)’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도판은 큼직한 종이에 종9품부터 영의정까지 내외직의 모든 관직 즉 참봉 만호 같은 하위직에서 판서 대제학 병사 수사 등 고위직을 망라하여 문관 무관을 구별치 않고 적은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 도나 개가 나오면 좋지 않은 벼슬을 받게 되며 윷이나 모가 나오면 좋은 자리를 받습니다. 벼슬살이를 계속하는 동안 좋은 말밭을 걷게 되면 고속 승진이 보장되어 영의정의 자리를 누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나쁜 말밭을 걷게 되면 유배를 가기도 하고 파직을 당하기도 하면서 변변치 못한 잔반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또 낮은 등급으로 내려앉거나 사약을 받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종정도를 이용해 윷놀이를 벌이면서 모든 관직을 외우게 되고 관직생활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수양의 정신을 되새기게 됩니다.
1020. 전통차를 음식에 활용하기 우리 전통차는 뛰어난 항암식품으로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차를 우려 마시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차 마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차를 음식에 응용해서 먹으면 차의 좋은 효능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차 성분에는 아스파라긴산이 많아 숙취 제거에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술에도 찻잎을 활용하면 좋습니다. 소주 1병에 찻잎 3그램이나 봉지차 2봉지를 넣어 5분쯤 담가두어 차 색깔이 우러나면 마십니다. 다만, 찻잎을 술에 오래 담가두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붉게 변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또 라면을 끓일 때 찻잎을 함께 넣고 끓이면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집니다. 그리고 밀가루에 차 가루를 섞어 수제비나 칼국수를 만들어 먹으면 맛과 색깔이 좋으며, 균형 잡힌 영양식이 됩니다. 유산균 음료(요구르트)나 우유에 차가루를 타서 거품이 날 정도로 잘 저어 먹어도 좋습니다.도다익장(都多益匠)은 공조에 2명, 상의원에 2명씩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1019. 궁중이나 양반가의 신부가 드리운 도투락댕기 머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머리끝에 드리우는 헝겊을 ‘댕기’라고 합니다. ‘열전’이나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 보면 백제, 고구려, 신라 모두 댕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도투락댕기’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신부가 원삼이나 활옷의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쓸 때 쪽진 머리의 뒤쪽에 붙여 길게 늘어뜨린 뒷댕기입니다. 너비가 10센티미터 정도로 보통 댕기보다 넓으며, 길이는 치마보다 약간 짧고, 두 갈래로 되어 있는데 수(壽), 복(福), 귀(貴), 희(囍),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등의 길상문자를 수놓거나 금박으로 새기거나 칠보, 옥, 진주 등 패물을 달기도 합니다. 도투락댕기는 ‘도다익당지(都多益唐只)’라고도 하는데 이를 만드는 도다익장(都多益匠)은 공조에 2명, 상의원에 2명씩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1018. 향초를 태우면 그 향기가 아름답다. “향초를 태우면 그 향기가 아름답고, 누린내 나는 풀을 태우면 그 냄새가 고약하다.(火之焚於薰者 其香美, 焚於蕕者 其臭惡)”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최유지의 글 ‘노화설(爐火說)’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향(香)’이란 글자는 벼 화(禾)자에 날 일(日)자를 하고 있어서 향은 벼가 익어가는 냄새를 말합니다. 하지만, 옛 문헌을 보면 기장 서(黍)자 아래 달 감(甘)자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장을 발효시킬 때 단맛이 나고 이것이 바로 향기의 원천이 된다는 뜻일 겁니다. 이 이야기들을 아울러 생각하면, 사람은 내면이 익어 발효될 때 아름다운 향기가 나온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요? 수양을 쌓고, 책을 읽어 교양을 담아가면 그 사람의 내면은 익어갈 것입니다. 그 내면을 태울 때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는 주변을 밝히고, 많은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1017.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최고라고 하는 까닭 아래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평생 벗이었던 초의선사에게 졸라 차를 선물 받고는 이에 대한 답으로 쓴 말년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한나라 비문 글씨에서 그 본을 구했지만 추사만의 글씨로 바꾼 것이지요. 추사는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로 칭송받습니다. 중국 서예가들을 본받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차별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에 그런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추사의 글씨는 디자인 개념이 가미된 서예작품이며, 글자 크기 하나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추사는 상황에 맞게 글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합니다. 또 같은 글자라도 분위기에 따라 변형을 했는데 한 작품에 동일한 글자가 여러 번 나와도 문맥을 보며 크기. 형태를 달리해서 썼습니다. 게다가 추사의 글씨는 회화성이 강해서 예서와 해서, 예서와 행서를 섞어 쓴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1015. 임금에게 언문으로 글을 올리다. “그 부인의 도리에 있어서 언서로 글을 올리는 것이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더구나 대신(大臣)을 신원하는 일과 관계가 있으니 금부와 정원에서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일상적인 법규로 개괄하여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에 대해 논한 바는 지나치다고 하겠다.” 이는 광해군일기 2년(1610) 5월 16일자의 기록입니다. 여성이 억울함이 있어 언문으로 공식문건을 만들어 관청에 접수했는데 이를 물리쳤어야 한다는 사간원의 의견을 광해군이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며,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했습니다. 당시도 벼슬아치들은 공식문건이 한문으로 되어야 한다며 주장하지만 언문이 서서히 공식문서로도 인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전의 어른들인 대비나 중전이 언문을 썼던 것과 함께 현대에 한글이 한문을 제치고 공식용어로 쓰일 수 있는 그 바탕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고 :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 김슬옹, 한국문화사
1014. 광주천 양옆을 늘어섰던 배롱나무의 아름다움 벚꽃축제가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4월이 되면 수백만이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깁니다. 전주-군산간 도로처럼 온 나라 길에는 벚꽃이 가로수로 뽐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엔 벚꽃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소쇄원, 석영정 등 아름다운 정원과 정자가 즐비한 광주천을 옛날엔 ‘’자미탄(紫薇灘)‘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주천 양옆에 늘어섰던 ’배롱나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배롱나무는 줄기와 가지가 아주 단단하고, 윤기가 나면서 고귀한 멋이 납니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날의 배롱나무는 벗은 몸과 같아서 사람의 손이 닿으면 가지 끝이 파르르 떤다고 ’부끄럼나무‘ 또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합니다. 또 한 여름엔 붉은 꽃이 피어 그 화사한 자태에 모두 취하는데 이 꽃이 다지면 벼가 익는다고 ’쌀밥나무‘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은 이젠 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