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6. 양반집 잔칫상에서나 볼 수 있었던 수제비 얼마 전 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수제비를 먹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습니다. 아마 검소하게 산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수제비는 팥수제비, 애호박수제비, 다슬기수제비, 고구마수제비, 감자수제비, 낙지수제비, 고추장수제비, 해물수제비 같은 다양한 수제비들이 있을 정도로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하지만, 옛날엔 궁궐이나 양반집 잔칫상에서 볼 수 있었던 귀한 음식입니다.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에는 밀이 적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한다. 그러나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서 혼인이나 잔치 같은 날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란 기록이 보입니다. 우리 겨레의 주식은 쌀과 보리였기에 밀의 재배는 아주 적었고 그래서 값이 비싸며 귀해 일반 백성들은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대장금’ 드라마에서도 밀가루를 도둑맞아 전전긍긍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865.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 내일은 24절기의 하나인 소설(小雪)입니다. 이때부터 점차 겨울로 들어가지만, 아직 따뜻한 햇볕이 남아있어 ‘작은 봄(小春)’이라고도 부릅니다. 소설은 눈이 적게 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첫얼음이 얼며, 첫눈이 오기 때문에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 호박오가리, 곶감 말리기 등 겨울나기 준비에 바쁩니다. 소설 무렵인 음력 10월 20일께는 이날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에 ‘손돌추위’가 온다고 합니다. 해마다 이날은 강풍이 불고 날씨가 찬데, 그래서 강화에서는 뱃길을 금합니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 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맥질하기 / 창호도 발라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 수숫대로 터울하고 외양간에 떼적 치고 / 우리 집 부녀들아 겨울 옷 지었느냐?" 농가월령가의 대목입니다.
864. 조선의 임금들은 검소한 삶을 살았다. 영조대왕실록 제79권 29년 5월 29일 조의 기록입니다.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환궁할 때 내의원제조 박문수가 탕제를 올리겠다고 하니, 임금이 ‘끝내 비가 내리지 않고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가 간절히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의 임금이 호화로운 삶을 산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일부 임금을 빼고는 대부분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임금의 수라는 보통 밥, 탕, 찌개, 김치 외에 반찬은 3가지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가뭄, 홍수가 들거나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면 임금은 자신이 나라를 잘못 보살펴서 하늘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거나 물을 만 밥을 먹기도 했고, 심지어 음식을 전혀 먹지 않거나 약도 먹으려 하지 않는 등 백성의 고통에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863. 술 이름 끝에 ‘춘’자가 왜 붙을까? ‘술’은 ‘곡류, 과일, 식물의 열매, 잎, 줄기, 뿌리 등을 발효시켜 뽑아내어 마시면 취하게 되는 마실거리’를 뜻하고, 한자로는 술 ‘주(酒)’ 자를 씁니다. 그런데 요즘 상품화된 술에는 주(酒) 자가 붙지 않은 ‘산사춘’이란 게 있습니다. ‘산사의 봄’이란 감성적인 뜻이 되겠지만 사실은 이 이름의 뒤에 붙은 ‘춘(春)’ 자도 술 이름으로 봄에 빚어 마시는 좋은 술을 뜻합니다. 중국 당나라 때에도 이화춘, 토굴춘 같은 유명한 술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서울의 약산춘, 평양의 벽향춘, 여산의 호산춘, 백화춘, 한산춘 같이 ‘춘(春)’ 자가 붙은 술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호산춘(壺山春)은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에서 나오던 술인데, 여산이 옛날에는 호산(壺山)으로 불렸기 때문에 ‘호산춘’이 되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 호산춘을 빚는 법이 보입니다.
862. 조선 여류문인 강정일당을 아시나요? “어느덧 나무마다 가을빛 물들어가고 / 석양에 어지러운 매미소리들 / 제철이 다한 것을 슬퍼함인가 / 쓸쓸한 숲 속에서 혼자 헤맸네!(萬木迎秋氣 蟬聲亂夕陽 沈吟感物性 林下獨彷徨)” 위 글은 “가을 매미소리를 듣고(聽秋蟬)‘란 제목의 한시로 조선 정조임금 때의 여류문인인 강정일당(姜靜一堂)이 지은 것으로 늦가을 쓸쓸한 분위기를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녀는 시문과 서화에 능하고, 성리학, 경술에 밝았으며, 글씨를 잘 썼고, 재덕을 겸한 비범한 여성으로 칭송받았는데 문화관광부가 지난해 7월 문화인물로 뽑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여류예술인으로 가장 유명한 신사임당과 삶에서 비슷한 점은 남편이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이고, 다른 점은 신사임당이 이율곡이란 훌륭한 아들을 두었지만 강정일당은 9자녀가 모두 태어난 지 1년도 안 돼 죽은 복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861. 마누라는 임금처럼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마누라’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낮추어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래 '마누라'는 '마노라'가 변한 것으로 '대비마노라', '선왕마노라'처럼 임금이나 대비, 세자, 세자빈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을 나타내는 낱말과 함께 쓰였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지체가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그 의미가 축소되어 지체가 높은 사람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가 지금처럼 바뀐 것입니다. 또 무속에서는 '산신마노라(산신님)', '터주마노라'처럼 '신'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요즘 지위가 낮은 사람이 그 윗사람을 '마누라'라고 부르면 큰 문제가 될 일입니다. ‘영감’이란 말도 역시 지체가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요즘은 남편을 부르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860. 결혼식은 민중혼례가 좋습니다. 요즘 결혼식은 거의 ‘웨딩마취’의 서양식이며, 결혼 예복도 턱시도와 웨딩드레스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큰돈을 들이면서도 별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서양식의 결혼식 말고 전통혼례, 궁중혼례. 민중혼례도 있습니다. 전통혼례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주는 등 여러 가지 의미가 깊은 의식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한문 용어로 되어있어서 뜻을 잘 알아들을 수 없고 그래서 지루하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궁중혼례는 약간의 비용이 필요하지만 결혼식 날만은 한번 임금과 왕비가 되어 대례식을 치릅니다. 여기에 좀 더 자유로운 ‘민중혼례’는 비용도 적게 들면서 신랑신부나 축하 손님들에게 쉽게 다가옵니다. ‘민중혼례’는 마당밟이 풍물, 신랑신부 들어섬, 꽃불 밝힘, 땅 술붓기, 손씻이, 맞절, 비나리, 잔나눔, 축하발림, 감사의례 등의 절차가 있는데 신랑신부에 맞도록 해줍니다.
859. 조선 임금의 수라상은 ’12첩 반상’이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이 반찬만 12가지인 ‘12첩 반상’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대전대 전통조리과 김상보 교수는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임금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환갑잔치를 벌였는데 이때의 모든 내용이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먹었던 잔치 음식이 ‘7첩반상’인데 반찬이 7가지가 아니라 장을 뺀 밥, 탕, 조치(찌개나 찜), 김치와 함께 양념 된 생선이나 고기를 대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운 음식인 적(炙), 젓갈, 자반 등의 3가지만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조선 임금의 식생활은 대부분 검소했으며, 평소 아침엔 죽을 먹었고, 가뭄이나 수해, 돌림병이 나면 임금이 물을 만 밥을 먹거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오경장 이후 화려한 식생활로 바뀐 것을 조선 전체의 모습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858. 세종임금은 천재였다. 세종임금이 세계 최고의 글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만으로도 천재임이 증명됩니다. 그것도 많은 학자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정의공주와 왕자들의 도움만으로 창제했음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종임금의 천재성은 훈민정음의 창제뿐만이 아닙니다. 세종학연구소 소장이며, 뉴욕주립대 명예교수 김석연 박사는 말합니다. “세종임금은 글자를 만들면서 말소리를 내는 입 안의 구조를 그대로 본 따 만들었다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더구나 엑스선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15세기에 그런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에 많은 학자가 혀를 내두릅니다.” 또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등룡 교수는 세종임금이 중국의 성운학에 능통했고, 이를 참고했지만 중국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음운학을 완성한 것에 대해 감탄합니다. 세종임금은 또 천문학,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도 천재성을 드러냈습니다.
857. 버선, 또 다른 한국의 아름다움 한복을 입을 때 신는 버선은 무명이나 광목들로 만들어 발을 다치지 않게 하고, 따뜻하게 하며, 발의 맵시를 내기 위해 신는 것입니다. 1527년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에 ‘보션말’이란 말이 보입니다. 버선은 앞코가 살짝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저고리의 섶코 그리고 기와집 처마와 함께 살짝 들어올린 한국의 아름다움입니다. 버선의 종류에는 홑버선, 겹버선, 솜버선, 누비버선들이 있으며 가죽으로 만든 가죽버선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신었던 맵시를 한껏 드러낸 버선은 오목버선 또는 타래버선입니다. 바느질 선의 모양에 따라 곧은 버선과 뉘인버선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조지훈의 ‘승무’에서는 오이씨에 비유하여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라고 노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