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글날 국경일 큰잔치 사진첩 우리의 위대한 글자 한글, 훈민정음 반포를 기리는 한글날이 560돌을 맞아 국경일이 되었다. 그 첫 국경일에 한글날큰잔치조직위원회와 국립국어원은 10월 9일 큰잔치를 열었다. 그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열린 훈민정음 반포 재현의식과 숭례문까지의 <어가행렬, 세종대왕 납시오!> 가 큰잔치의 고갱이었다. 이 행사는 종로구청이 주최하고, 한글날큰잔치 조직위원회, (재)한글학회, (재)세종대왕기념사업회 가 주관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문화관광부, 국방부, 문화재청이 후원하고, (사)한민족문화대로이 총기획, 진행했다. 그 행렬엔 유치원 어린이들이 예쁜 한복 차림으로 직접 만든 손팻말을 들고 참여하여 시민들의 큰 손뼉을 받았으며, 많은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처음있은 반포 재현의식은 경복에 온 많은 외국인 관람객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정부의 공식 기념식이 있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한글날큰잔치 어울림마당'도 있었다. 이 한글날 큰잔치의 이모저모를 사진첩에 담아보았다. ▲ 한글날 기념식장인 세종문화회관 앞에 걸린 560돌 한글날 경축 펼침막 @김영조 ▲ 5
830. 성종임금, 물을 만 밥을 올리도록 하다. “원상 최항, 김질이 아뢰기를, ‘근래 날씨가 가뭄이 들어 임금께서 감선(減膳: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 임금이 몸소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던 일) 하신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낮에 수반(水飯:물만 밥)을 올리도록 하시니, 예전 임금님께서도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세종임금께는 비록 풍년이 들었더라도 수반을 올렸는데, 지금 수반을 쓴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김질이 다시 아뢰기를, ‘보통 사람들도 지라와 위장이 찬 것을 싫어하기에 수반이 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하는데, 하물며 임금님께서야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하니 다시 명을 내리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매양 마른 밥만 먹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성종실록 6권 1년 6월 1일조에 보면 나오는 대목인데 성종임금의 검소하고,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보입니다.
829. 궁궐을 짓는데 쓴 소나무 “황장목” 경복궁 등 조선시대 궁궐은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이는 소나무가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으며 강도가 높고, 게다가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만 건축재로 썼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던 배를 만드는 조선재와 죽은 사람의 관을 짜는데 썼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속이 누런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렀으며 '황장금표' 등의 표식을 세워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힘썼지요. 또한 정조 때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 해서 소나무 베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산림청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했는데 여기서 30년 동안 1위를 차지할 만큼 소나무는 우리 겨레의 나무입니다.
828. 호적의 본관제도는 신분을 결정짓는 굴레였다. 호주제의 근간이었던 호적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 호적은 국보 131호 ‘이태조 호적 원본(太祖戶籍原本)’입니다. 이것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려 때 호적인데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 그의 고향 함경도 영흥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여기에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 이씨로 나오는데 이는 그의 조상이 전주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실제 거주지를 본관으로 했고, 이를 호적에 기록했으며, 나라의 허락없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본관은 그 사람이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에 사는지, 신분적으로 낮은 사람이 사는 속현이나 천민들이 사는 향, 소, 부곡에 속했는지를 말해주는 증표입니다. 따라서 본관은 원래 신분과 직업을 말했고,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는 천민들의 족쇄였습니다. 결국 좋은 제도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참고 : "에이취디역사스페셜", 효형출판
827. 남자 한복에 두루마기는 예의입니다.. 얼마 전 한가위 때 텔레비전에서 우리는 한복을 입은 연예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한복 입은 모습 중 눈에 거슬리는 것은 남자가 배자나 마고자 차림에 두루마기를 입지 않은 것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은 외출할 땐 두루마기 차림을 예의로 알았고, 배자나 마고자 차림은 방안에서 입는 실내옷으로 생각했으며, 더운 여름날에도 모시 두루마기를 입었습니다. 물론 서양옷도 여름엔 와이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점잖은 자리엔 그런 차림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을 상대로 출연한 사람들이 그런 차림이라면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입니다. 한복은 건강에 좋은 옷이지만, 또 다른 특징인 품위와 아름다움, 그 속에서 나오는 예의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또 그런 차림을 해주는 한복쟁이들도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826. 고려 사람들은 인사를 잘 했다. 중국 송나라 서긍(1091~1153)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줄임말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서긍이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을 때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일종의 견문록을 쓴 것인데 고려의 일상생활, 사회와 문화를 구체적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이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자기가 통솔하지 않는 관원을 만나거나 오래 서로 보지 못한 관리와 병사들도 어디에서 만나건 반드시 인사를 한다. 남에게 인사를 받고 답례를 하지 않으면 인사한 사람에게서 공경을 잃는다.” 서긍은 고려 사람들이 송나라 사람보다 훨씬 예의를 잘 지킨다고 생각했고, 이를 부러워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하고, 이것이 마치 우리 겨레의 특성인 양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도경을 보면 우리 겨레는 인사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825. 훈민정음 반포 재현의식과 어가행렬이 있었다. 지난 10월 9일은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로 큰잔치가 있었습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훈민정음 반포 재현의식은 역사상 처음 있은 일입니다. 반포 재현의식에선 정창손 등이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리자 세종임금이 크게 나무라며, 옥에 가두라는 어명을 내리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세종대왕 역에는 시민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한 ‘세종대왕 납시오!“란 이름의 어가행렬은 시민들의 큰 관심 속에 고적대가 대취타를 연주하며 앞장 서 가고, 깃발을 든 한글단체 회원들과 시민 수백 명이 참여하여 경복궁에서 숭례문 광장까지 있었습니다. 특히 이 행렬엔 50여 명의 유치원 어린이들이 예쁜 한복을 입은 채로 고사리손으로 손수 쓴 손팻말을 들고 참여하고, 경북 풍기에서 올라온 50여명의 초등학생들은 어른들도 무겁다는 깃발을 들고 끝까지 참가하여 큰 손뼉을 받았습니다.
824. ‘훈민정음’이 ‘한글’로 바뀐 사연 한글은 세종임금이 28자를 반포할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훈민정음’이 왜 ‘한글’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훈민정음을 반포 이후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 암클, 아랫글이라고도 불렀으며, 한편에서는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근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13년 주시경 선생께서 언문이라는 이름은 ‘상말을 적는 상스러운 글자’라는 뜻이 담긴 사대주의에서 나온 이름이라며,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또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 반포 8회갑이 되던 병인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하여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부르다가 1928년에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 ‘한글’이 보편적으로 쓰였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의 뜻은 ‘한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으뜸가는 글’등으로 풀이됩니다.
823. 훈민정음은 어떻게 반포할 수 있었나? 오늘은 세종큰임금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60돌이 되는 날이며, 국경일로 잔치를 하는 첫날입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할 때에 나라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으로 찌든 벼슬아치들이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최만리 등이 강한 반대 상소를 올리는 정도였습니다. 세종큰임금은 이를 어떻게 극복해냈을까요? 세종큰임금은 절대권력자였지만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았습니다. 세종은 먼저 ‘백성들에게 한자의 올바른 음을 가르치기 위하여(훈민정음) 글자를 만든다.’는 논리로 중국의 간섭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곤 학문적 완성도를 위해 요동에 있던 중국의 학자 황찬을 10여 차례 찾아가 배우게 했습니다. 또 세종은 창제하고 나서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들로 번역하여 실험하고, 시험제도에 도입하여 기정사실화하도록 치밀한 작전을 펴 나간 것입니다. 거기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우리말 지킴이 '국회', 으뜸 훼방꾼에 '교육부'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2006년 지킴이와 훼방꾼 발표, '처음처럼'도 선정 올해는 처음으로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여 잔치를 한다. 그 잔치 가운데에는 "세종대왕 납시오!"란 이름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했던 의식 재현 행사와 어가 행렬이 있다. 이제 우리의 한글날은 이렇게 온 겨레의 잔치로 치르는데 이에 한글의 발전을 위한 지킴이가 된 단체나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글을 홀대하고 훼방하는 단체나 기업, 사람들은 여전하다.이에 오랫동안 우리말 지킴이와 훼방꾼을 발표해온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공동대표 김경희·김수업·김정섭·이대로, 아래 겨레모임)는 10월 4일 이른 11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2006년 우리말 지킴이와 훼방꾼을 발표했다. ▲ 4일 이른 11시,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은 '2006 우리말 지킴이, 훼방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영조 겨레모임은 올해의 으뜸지킴이로 대한민국 국회를 뽑았다. 국회(의장 김원기)는 지난해 12월 8일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한글역사에 길이 빛날 큰일이고, 잘한 일이기에 2006년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뽑아 우리말 독립운동사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