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 절대군주 정조임금의 백성사랑과 슬기로움 효성이 지극한 정조임금은 해마다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 화성에 갔습니다. 그중 혜경궁홍씨의 회갑연과 겹쳐 있었던 을묘 원행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그에는 정조임금의 효성, 끔찍한 백성 사랑 그리고 슬기로움이 잘 드러납니다. 정조는 원행 중 화성 신풍루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열어 비단 한 단씩을 나눠 주기도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직접 만나 삶의 소리를 듣고, 이 자리에서 환곡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또 반대세력이 정조의 암살을 노린다는 정보를 듣고도 일망타진하기보다는 조선 최고 무술의 장용영 마작대가 철통 경비한다는 등의 소문을 내 반대세력이 지레 겁을 먹어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절대군주인 정조임금이지만 요즘 정치가들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775. 이런 양심적인 일본 사람도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초가 한 채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추운 겨울에 외로이 서있고 나머지는 빈 공간인 쓸쓸한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1974년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세한도를 해방 직전인 1944년 일본인 수집가 후지즈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서예가 손재형은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쿄의 후지즈카 집에 100일 간 날마다 찾아가 문안인사를 했습니다. 그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아무 조건 없이 세한도를 내주었습니다. 이후 62년 뒤 올 초 후지즈카의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는 과천시에 추사의 미공개 편지 20점을 비롯한 문화재 3700여 점을 기증하고, 추사연구에 써달라며, 200만 엔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일본엔 역사왜곡에 신사참배를 일삼는 파렴치한 일본 정치가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양심가도 있었습니다. 좋은생각 2006년 9월호 “대 이은 문화재 반환”
774. 벌레 먹은 배추, 사람 먹기도 좋다. 몇 년 전 서울시의 친환경농장에서 농사를 짓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농장에 갔는데 농장주가 흥분해서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한 회원이 친환경농사라는 걸 잊고, 배추에 벌레 먹은 구멍이 났다며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배추를 모두 가져다 맛있는 김치를 담가 먹었습니다. 예전 농민들은 콩을 심을 때도 한 구멍에 세알씩 심었습니다. 한 알은 날아다니는 새를 위해, 한 알은 기어 다니는 벌레를 위해, 나머지 한 알만 자신을 위해 심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가 이젠 새고 벌레도 다 싫고, 나만 먹겠다는 생각으로 농약을 듬뿍 치기 때문에 더불어 죽는 길을 맞았습니다. 벌레가 먹을 수 있다는 건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건 우리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시장에 채소를 사러 가면 벌레 먹은 것을 찾아보십시오.
773. 조선 초기엔 차를 별로 마시지 않았다. “경연에서 공부하다가 차를 전매하는 법[각다법:搉茶法]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차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의 단속을 엄히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대궐 안에서도 차를 쓰지 아니하니,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달라서 이러하였다.” 하니, 시강관 김빈이 “중국 사람은 모두 기름진 고기를 먹으므로, 차를 마셔서 기름기가 빠져 나가게 하려는 것이며, 또한 손님을 접대할 때에도 반드시 차를 먼저 내고 나중에 술을 들여옵니다.”하였다. 위 글은 세종실록 중 세종 12년(1430년) 12월조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물론 조선 후기에 오면 다산, 추사, 초의선사 등 차에 푹 빠진 사람들이 있고, 선비들 사이에선 차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앞의 세종실록을 보면 조선 초기엔 차를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차는 기름진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호품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772. 세상에서 자연과 가장 닮은 그릇, 옹기 세상에서 가장 자연에 가까운 그릇은 무엇일까요? 옹기(甕器)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였으며, ‘사람의 손길조차 닿지 않았던 것 같은 원시 그대로의 자연성이 있다’라는 덧붙임 설명이 있습니다. 옹기는 깨지면 바로 흙으로 돌아가는 성질 때문에 ‘자연과 가장 닮은 그릇’이라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어 쓴 것으로 짐작되는 옹기는 우리 배달겨레만이 가지는 독특한 그릇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은 옹기를 술을 발효시키는 그릇부터 간장, 된장을 담는 장독, 김칫독, 물독, 떡시루 따위의 커다란 그릇은 물론 뚝배기, 종지 등의 작은 그릇, 굴뚝, 촛병, 등잔, 기와, 소줏고리(소주를 내리는 데 쓰는 재래식 증류기), 주전자, 장군(물, 술, 간장, 똥오줌 따위의 액체를 담아서 옮길 때에 쓰는 그릇) 등으로 다양하게 써왔습니다.
771. 광복 61돌을 맞아 다시 생각할 것들 오늘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61돌 광복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진정 광복을 맞았는지 되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일본은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일삼고 있습니다. 일본 수상이 신사 참배를 하고, 독도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그것들이 혹시 우리가 빌미를 준 것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넘었건만 아직 일본말 찌꺼기가 버젓이 쓰입니다. 그것을 지적하면 여태껏 잘 써왔는데 새삼 왜 시비냐고 합니다. 또 일본에서 역수입된 녹차와 다도를 우리 것인 양 말하는 이들이 있으며, 제대로 발효가 되지 않은 일본 미소된장을 좋다고 사먹는 사람들도 있고 역시 일본 수입품인 화투에 열광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청소년들은 일본 만화와 영화에 빠지며, 한복은 외면하고, 기모노를 좋아 합니다. 1945년의 광복은 외세가 가져다주었지만 진정한 광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조선엔 위대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서평] 고진숙의
770. 일본에서 출간 직후 강제 회수당한 책 언론, 출판의 자유를 내세우는 일본, 그들이 한 책이 출간되자마자 강제 회수를 했습니다. 그 책은 최근 발행된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란 책의 저자인 민족사학자 고 이종기 선생이 1976년 일본 후타미 서원을 통해서 낸 “히미꼬 여왕 도래에 얽힌 수수께끼(卑弥呼渡來の謎)”입니다. 책에는 당시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개문을 곁들이고, 아사히 신문에 전단광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 책을 강제회수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책의 내용은 김수로왕후의 꽃가마배, 수로왕의 딸 히미꼬 공주의 거북배와 관련된 것입니다. 한반도의 김해와 인도 아요디아, 그리고 일본 규슈 지역을 탐사하여 고대 일본왕국 히미꼬 여왕은 가야 김수로왕의 딸임을 밝혔습니다. ‘임나일본부’라는 가짜 나라까지 만들어가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었다고 우기는 그들은 이 책을 보고 기겁했을 것입니다.
769. 조광조의 글에서 찾는 귀중한 교훈 “세종 임금은 대신들, 집현전의 선비들과 서로 진지하게 토론을 하였는데, 마침내 말년에 궁궐 안에 내불당을 만들자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학자들이 모두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세종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황희에게 ‘집현전의 모든 선비가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어쩌면 좋겠소?’ 하시자, 황희가 ‘신이 찾아가서 달래어 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여러 학사의 집을 찾아다니며 집현전에 나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세종 임금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황희 같은 이가 그 당시의 정승이 아니었다면 임금은 틀림없이 집현전을 비운 선비들을 엄한 벌로 다스렸을 것이며, 황희 정승 역시 두루 돌아다니며 머리를 숙여 간청하는 것을 굴욕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위 글은 조선조의 명신 조광조가 쓴 ‘정암집(靜庵集)’에서 옮긴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귀중한 교훈이 아닐까요?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옛글 백가지” 조면희, 현암사
768. 한글날 국경일 기념주화 나옵니다. 한국은행이 ‘한글날 국경일 제정 기념주화’를 만든다고 합니다. 희소가치를 위해 5만 장 이하의 소량으로 발행되며,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별전과 모양이 같은 가운데가 4각형의 구멍이 난 뚫새김(투각) 형태라고 합니다. 이 기념주화는 액면금액이 20,000원인 무광(Proof급) 은화(은 99.9%)*로 만들며, 앞면에는 “효뎨례의” 별전(別錢)**을 재현한 디자인을, 뒷면에는 한글 자음을 아름답게 조합한 디자인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별전은 조선 후기에 주화(鑄貨)의 본보기나 기념 화폐로 만든 엽전인데 “효뎨례의” 별전은 이중 한글이 새겨진 유일한 주화로, 고전대감(古錢大鑑)에 보면 훈민정음이 돈처럼 널리 쓰이라는 의미에서 세종임금 때 만들었다고 합니다. “효제례의(孝悌禮義)”는 효와 우애, 사람 사이의 믿음과 예, 검소와 염치 등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전통사회의 기본 덕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