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그저 감정적으로만 이 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처럼 자료에 입각하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을 거쳐 이를 비판하는 책은 없을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쓴 《개발 없는 개발》이 보이더군요. 당장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허 교수는 오랫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사는 침략, 수탈, 저항 등의 키워드로 뒤덮여왔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한 맞바람은 외국에서 왔습니다. 피티(Mark R. Peattie)가 ‘개발과 수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개발’이라는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개발의 측면을 부각시키지만 여전히 ‘수탈’에 방점이 찍혀 있었는데, 점점 더 ‘개발’에 비중을 드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바로 이런 학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허 교수는 일제 강점기 각종 경제통계를 훑어보면, 개발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 지배가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조선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부당한 것이었다는 점도 명백하다고 합니다. 한편 개발론자들은 식민지 조선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 당시 석유 한 됫박에 29원이었다. 우리 집은 석유 한 됫박으로 한 달 넘게 등잔불을 밝혔다. 어머니는 석유 타는 게 아까워 일찍 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가난 때문에 한 달에 20원 하는 기성회비를 3년간 내지 못했다. 집안이 기울어 초등학교4,5,6학년의 3년간을 기성회비 한 푼도 못 내고 학교를 다녔다. 선생님이 돈을 가져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도 나는 집으로 가질 않았다. 집에 간들 돈이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수진(67) 씨가 쓴 자서전 《머물고 싶은 간이역 1,2》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난 7일(월) 아침 10시, 경기도 하남시(시장 김상호) ‘나룰도서관’에서는 아주 뜻깊은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나룰도서관’에서 지난 4월부터 모두 20회에 걸쳐 진행한 시니어 자서전 문화프로그램의 결실을 맺는 시간이었다. 모두 20여명이 신청하여 의욕적인 자서전 쓰는 시간을 가졌지만 11명만이 끝까지 자서전 쓰기에 살아남아 이날 자서전 출판의 기쁨을 가졌다. 사실 자서전 쓰기가 말 같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룰도서관’의 시니어 자서전 프로그램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대개가 6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소명출판은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이극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극로 전집(전 4권)》을 9월 30일 펴냈다. 이극로(1893~1978)는 조선어학회 대표로서 한글맞춤법통일ㆍ표준어사정ㆍ외래어표기법제정ㆍ한글지 펴냄 같은 큰 업적을 남겼다. 광복 이후 건민회 등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월북했다. 월북 이력 때문에 남한에서 조명 받지 못하고 자료들이 산재되어 있었으나 저자인 국학인물연구소 조준희 소장(49)이 2006년부터 유럽을 4번 답사해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지 국립도서관, 문서보관소, 고서점에서 친필 편지와 저술 원본을 다수 입수해 이를 책으로 펴냈다. 유럽에서 처음 조선어강좌를 개설했던 이극로(독일명 Kolu Li)의 행적을 눈으로 확인한 조 소장은 장장 13년 작업 끝에 독일어로 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중국의 실크 공업’을 비롯한 모든 나라밖 저술을 완역했고, 북한 자료까지 총망라해 4권, 2,500 쪽 분량으로 이극로 전집을 완간했다. 1권은 유럽 편으로 이극로의 독일 유학 시기부터 도미 시찰 시기까지를 다뤘다. 독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지금의 훔볼트 대학) 유학 시절 예비 논문과 박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SNS에 올라온 광고를 보니 배달겨레의 시조인 단군임금이 하늘을 연 날인 개천절을 기려 “개천문화국민대축제”를 연다고 떠들썩하게 알리고 있다. 그런데 ‘축제(祝祭)’라는 표현의 뿌리는 기독교에서 시작되었다. 예수가 죽어 부활한 것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신에게 피가 흐르는 양(羊)고기를 바치고 지내는 ‘제사(祭祀)의식’을 그들은 festival[성일(聖日), 주일(主日)이라고 하였다. 그 ‘페스티벌’을 이웃나라 일본인들은 ‘축제(祝祭)’라고 번역하였고, ‘마츠리’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때부터 우리 민족에게 교육하였다. ‘축제’라는 것을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축하하여 지내는 제사의식”이 된다. 기독교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축하(祝賀)하여 벌이는 의식이나 행사를 ‘잔치’ 또는 ‘축전(祝典)’이라고 표현을 하였고 본디부터 “축하하여 제사를 지내는 짓거리”는 없었다. 다시 말하면 ‘축제’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의 ‘찌꺼기’로 이제는 그런 일제 잔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의 억누름에서 벗어난 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정부와 관청, 언론사, 대학들까지 앞장서서 의미없는 ‘축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가츠 에츠코(永津悦子, 70살) 씨는 자신이 쓴 《식민지하의 생활의 기억, 농가에 태어나 자란 최명란 씨의 반생 (植民地下の暮らしの記憶 ‘農家に生まれ育った崔命蘭さんの半生’)》(三一書房. 2019.8)이란 책을 얼마전 기자에게 보내왔다. 이 책은 나가츠 에츠코 씨가 재일동포인 최명란(92살) 씨와의 대담을 통해 일제침략기 조선여성의 농촌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한 책이다. 나가츠 씨가 이 책의 막바지 교정을 볼 무렵인 지난 5월 20일, 기자는 일본 가마쿠라(鎌倉)에서 나가츠 씨를 만났다. 나가츠 씨는 일본 고려박물관(1990년 9월,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뜻에서 양심있는 시민들이 만든 단체) 조선여성사연구회 회원으로 2014년부터 재일동포인 최명란 씨를 만나 5년 동안 대담에 성공, 이번에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 가마쿠라의 한 찻집에서 나가츠 씨는 교정본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쓴 계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14년 고려박물관 주최로 ‘식민지 시절 조선의 농촌 여성’ 전시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최명란 씨를 수년 동안 대담하는 과정에서 얻은 자료가 있어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느 때는 아침 10시에 만나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해마다 ‘한글날’이 돌아오면,- 어디론가 으슥한 데로 숨어 버리고만 싶다. 오늘도, 앞산마루에 세워져 있는 <항공방제시비>라고 쓰여 있는, 큼직한 광고판이 더욱 더 눈에 거슬린다. 동네 꼬마들은 “지나가는 비행기에 시비(是非)를 걸면 안 된다.”라고 이해하고 있다. 한글로 표현된 보호수라는 알림판을 초등학생에게 물어보면 ‘보호’는 알겠지만 ‘수’는 모른다고 한다. “‘수요일’을 ‘보호’하자?”라는 정도다. ‘보호수(保護樹)’와 ‘노거수(老巨樹)’는 일본식 한자말로 씨알머리 없는 공무원들이 일본의 자료를 그대로 베껴서 가져온 표현이다. 내용에는 수종, 수령, 수고라는 한자로 쓰여야 할 말들이 뜻을 알 수 없는 한글로 쓰여 있다. 우리의 전통 ’당산(堂山)‘이나 옛터에 남아있는 오래된 나무에는, 어김없이 ‘보호수’라는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보호하는 나무” 또는 “돌봄이 나무”처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하고, ‘나무의 종류’, ‘나무의 나이’, ‘나무의 높이’, ‘나무의 둘레’로 써서 알려야 옳을 것이다. 어쩌다가 당산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꼴불견의 알림판 때문에 한심하여 저절로 눈물이 나올 정도다.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이 책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형구네 고물상」에서 아역배우였던 형민이 38년 뒤 「그 시절, 그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설은 형민의 유년시절 회상부터 어머니, 아내, 형민 회사의 동료들, 아파트 이웃들, 길에서 만난 인연, 그리고 형민을 인터뷰하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사회자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작가는 기쁨과 슬픔의 일상들을 따뜻하지만 덤덤한 어투로 표현했는데, ‘작가는 어느 정도의 슬픔이 적절한지, 또 어느 정도의 희망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형민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냥한 사람’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은 왜 ‘상냥한 사람’일까? 여기서 ‘상냥한 사람’이란 바로 형민처럼 다른 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닐까. 지은이 윤성희, 창비 출판, 2019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사서추천도서 제공>
[우리문화신문=홍사내 칼럼니스트] 하나. 들어가는 말, 광화문의 유래 광화문에 대한 처음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실록에서는, 경복궁을 준공하면서 태조가 정도전에게 명하여 모든 궁과 성에 이름을 지어 붙이도록 하였는데 유독 광화문의 이름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 보이는 글은 태조 4년(1395) 9월 29일 기록인데 여기에서는 경복궁을 다 짓고 그 남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그해 10월 7일 기록에서는 정도전이 ‘정문(正門)’이라 이름지어 임금께 글을 올리면서 그 이름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두 글만 본다면 정도전이 먼저 ‘정문’이라 이름지었는데, 뒤에 《태조실록》을 엮은 실록청 사람들이 실록을 엮을 당시에 바뀌어 쓰던 이름인 ‘광화문’으로 잘못 기록하였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정문을 광화문으로 바꾼 연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살펴보니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엮었다. 처음 태종 13년(1413) 3월에 엮었던 것을 세종 30년(1448) 6월에 정인지 등이 증보 편수하였음이 《태조실록》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세종실록》에는 세종 6년(1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꿈도 앞으로 간다 (1) 시간은 앞으로 간다 오늘이 가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와서 오늘이 된다 기억은 뒤에서 온다 시간이 지나가며 새겨 놓은 것들을 끌고 이 순간까지는 오지만 오늘을 앞설 수 없다 (2) 아내가 유난히 뒤척인 밤 새벽 이었다 “엄마. 성은이 안 들어 왔지? 사고 나서 죽었대. 친구들이랑 놀러 가다가 차가 물에 빠져 다 죽었대.“ 아내는 바다를 사랑했다 자주 까막바위를 찾아 지그시 파도가루를 맞곤 했다 그날 이후로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다 (3) 꿈 하나가 또 졌다 꽃망울 한 송이가 13층 옥상으로 올라가 스스로 나뭇가지를 잘랐다 딸아이를 따라 가겠다던 그 아이였다 소름 끼치는 숙명처럼 아내와 나는 하필 그 순간 그곳을 지나게 되었을까 육체의 소멸과 왜 또 마주하게 되었을까 (4) 이제 둘 남았다 밤낮으로 모여 재잘대던 꽃망울 다섯 가운데 벌써 세 송이가 졌다 시립묘지에 비석 하나가 또 는 것이다 이번 아이는 정말 딸아이와 한 몸 같은 아이였다 딸아이에게 받은 선물들을 곱게 싸놓고 두 번째 아이에게 배운 방법으로 친구들을 따라갔다 아내는 바람을 사랑했다 때때로 하평언덕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편집국장] 문화재청은 지난 8월 20일 ‘한양도성 돈의문 IT건축 개문식’ 행사를 열었다. 올해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100돌을 기려 1915년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돈의문을 IT 기술(가상ㆍ증강현실)로 복원한 것이다. 이날 공개된 돈의문 상징물은 돈의문 현판(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한자 획을 한글로 변환ㆍ응용한 새로운 글자체를 사용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문화재청이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고집하였던 것에 견주면 참으로 뜻밖이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나명하)는 지난 8월 14일 문화재위원회(사적분과) 보고를 거쳐 광화문 현판 바탕은 검정색, 글자는 동판 위에 금박으로 재제작하고 단청은 전통소재 물감을 쓰기로 최종 결정하였는데 거기에 사용하는 글씨는 광화문 중건 당시 임태영이 쓴 한자 글씨를 디지털 복원한 것이다. 그동안 현판에 금이 가 그것을 내리고 새로 현판을 만들어 달면서 글씨의 색깔을 중건 당시와 같게 바꾼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현판의 색상이나 크기가 아니다. 광화문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하여 한자 현판일지 한글 현판일지 다시 숙고할 필요가 있음이다. 그동안 문화재청과 문화재 관계자들은 한자를 고집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