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기자] 귀혼선은 다시 남해로 방향을 잡아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동해의 황홀한 태양이 바다위에 힘차게 솟아 올라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대자연의 웅대한 아름다움 아래서 원사웅은 자신을 발견하고 기절한 여인의 고운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 * *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병 3천을 긴급하게 모아서 양산으로 향하였다. 본래 토왜대장 정기룡이 활동하고 있는 상주로 가서 합류하려고 하였으나 시각을 지체할 수 없어서 인편으로 전갈을 보내어 부산에서 멀지 않은 양산으로 약속을 정했었다. “곽장군님!” 정기룡 장군은 반가움에 목소리가 약간 젖어있었다. 홍의장군 곽재우보다 10년 아래였으나 사실 벼슬로 따진다면 고위 관리였다. “어서 오시게. 고맙네.” 정기룡은 관군 5백 명을 이끌고 달려와 주었다. 그 5백 명은 정기룡이 직접 선발하여 훈련시켜 온 정예 병력이다. 임진 전쟁 이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 기간 동안 정기룡은 불철주야(不撤晝夜) 관군들을 뽑아서 무예와 전술 등을 지도하였다. 정유년 일본의 재침략에 그 빛을 발휘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부산을 공격하신다는 서찰을 받고 무조건 달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호에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사 경향신문이 낸 광고는 그 규정을 깡그리 짓밟고 있습니다. 한글이 아닌 영어를 대문짝하게 써서 광고한 것입니다. 물론 언론사는 사기업이니까 이 규정에 얽매이는 것은 아닙니다만 한국방송공사(KBS), 한국교육방송공사(EBS)도 공공기관으로 보고 언론이 공공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이에 준한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 광고는 이름부터 “SEOUL CHRISTMAS –Festival 2016-”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말로 “서울 성탄절 큰잔치”라고 하면 안 되나요? 그리고 굳이 영어를 써야 한다면 국어기본법 규정대로 “서울 성탄절 큰잔치(SEOUL CHRISTMAS –Festival 2016)”처럼 한글로 먼저 쓰고 괄호 안에 영어를 써야 할 일이지요. 전 연변대학교 총장이 “만주족은 말[馬, 言]에서 내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라고 한 말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 광고 바로 옆에는 한국불교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세종은 47살 때인 음력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고 50살 때인 1446년 9월 상한(1일-10일)에 《훈민정음》이란 책을 통해 새 문자를 백성들에게 알렸다. 1443년 음력 12월은 훈민정음 28자가 세상에 공개된, 그야말로 훈민정음 28자의 기적이 일어난 달이다. 그 기적은 세상에 57자의 단출한 기록으로 드러났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자(세종실록 온라인판 영인본에 의함) (번역)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본뜨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간결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공교롭게도 북한은 창제한 날을 남한은 반포한 날을 기념일로 삼고 있다. 분단의 아이러니이지만 이제는 남북이 연계하여 창제한 날과 반포한 날을 함께 기려야 한다. 필자는 창제한 날은 문자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기자] “저쪽을 살펴보게. 난 이쪽으로.” 그들은 각기 3명씩을 한 조로 하여서 나누어 어선들이 밀집해 있는 포구의 좌측과 우측을 훑었다. 이몽귀는 간혹 위협 발사를 계속 하였다. 마침내 원사웅은 문제의 운반선을 발견하였다. 그 배에는 약 10여 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선실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 죽일 놈들! 조선 병사의 코를 내 놓아라!” 일당백 원사웅은 고함을 내지르면서 맨 앞장서 나오는 일본 병사의 다리를 노리고 장검을 날렸다.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면서 일 검을 발출한 것이었다. 설마 상대방이 하체를 공격하리라고는 예상 못한 병사는 다리를 움켜쥐고는 비명을 질렀다. 칼은 병사의 다리 하나를 동강내고 말았다. 원사웅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펄쩍 뛰어 오르며 이번에는 다른 병사의 상체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악!” 그는 가슴에 칼을 맞고 꼬꾸라졌다. 원사웅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찔러오는 장창을 비스듬히 피하면서 연속 두 명을 베어 넘겼다. 원사웅은 두 살 때부터 부친 원균의 장검을 휘둘렀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무예에 대한 조예도 상당하였다. 원사웅은 눈 깜박할 사이에 일본군 4명을 베어 넘기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편집국장] 어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가결되었다. 그것도 ‘겨우’가 아닌 ‘압도’적인 표차였다. 234 대 56, 결과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지탱해왔던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은 탄핵에 찬성했다. 그런데 여야당 국회의원 모두 표결 내내 조용하고 침통한 모습이었다. 언론은 이를 보면서 12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하던 때와 견주는 모습에도 열을 올렸다. 당시는 새벽부터 표결까지 난투극과 육탄전이 벌여졌고, 국회의장은 국회 경위를 동원해 의장석을 점거한 의원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탄핵안이 가결되자 탄핵파 의원들은 만세삼창을 불렀고, 반대파 의원들은 통곡을 했다. 그때와 지금의 탄핵안 표결 장면이 어찌 이리 다른 모습일 수 있을까? 언론들은 당시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위법 사실이 중대하지 않다며 기각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엄중한 것은 이번 탄핵이 국민 80% 가량이 찬성했을 만큼 대통령의 위법에 대해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분노한 국민이 촛불시위로 그 분노를 명백히 표출한 탓이 크다고 진단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국민은 촛불시위 정국을 지나며 정말 무섭고 위대한 힘을 보여줬다고 하지 않을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대구 시내를 지나가다가 도로 안내팻말을 보았습니다. 흔히 다른 도시에서는 “사거리”라고 쓰는 것을 이곳에서는 “만촌네거리”, “황금네거리”, “동성학교 네거리” 등으로 썼습니다. 별 것 아닐지 몰라도 한자말 “사(四)”를 우리말 “네”로 쓴다는 것은 대구시청의 우리말 사랑에 다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요. 그에 더하여 연못을 “지(池)”라는 한자말로 쓰지 않고, “수성못”이라 쓴 것도 칭찬합니다. 우리말 사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구시를 칭찬합니다. 그런데 기업이 만든 대구시내의 한 아파트 이름은 온통 영어투성이입니다. “LOTTE”, “HWASUNG”, “Castle Gold Park”라는 영어로 도배된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죽은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도록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썼다는 게 사실인가요? 국어기본법에는 공문서를 쓸 때 한글로 쓰고 굳이 영어와 한자를 쓰려면 괄호 안에 쓰라고 했는데 공문서도 아니고 사기업이니까 상관없다는 것인가요? 연변 조선족 동포들은 간판을 쓸 때 한글을 먼저 쓰고 한자를 그 아래에 쓰는데 그들 동포들보다 못한 우리 기업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하야 하야 하야 하야하여라 박근혜는 당장 하야하여라“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서 떼창으로 불려지는 하야가다. 200만 명이 부르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포하는 온 국민의 외침이다. 준엄한 명령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한 건의 불상사도 없다. 이런 성숙한 국민 수준을 얕잡아 보는 정치권은 무엇이냐? 어느 정치인은 촛불은 꺼질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 촛불은 보란 듯이 더욱 많이 더욱 찬란하게 타오른다. 아니 촛불이 아니라 횃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남녀노소가 없다. 머리가 허연 어르신은 물론아빠의 목마를 탄 어린이까지 촛불집회장은 분노의 표출이자 잔치마당이었다. 정말 이 엄중한 꾸짖음을 보고 이제 어떤 정치권이 국민을 무시하고 꼼수를 부릴 것인가? 요 몇 년 사이 가장 큰 고통을 겼었던 아니 지금도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학생의 어머니가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오열하면서 조목조목 호소한다. 대통령의 7시간 어디서 뭘 했기에 우리 아이들이 선실에서 울부짖다가 죽어가도록 했는지 묻는다. 이를 듣고 있던 많은 이들이 훌쩍인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매주 교대로 출연하는 유명 가수들. 이제 한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기자] 이들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장병 하나가 소리쳤다. “섬입니다. 멀리 섬이 보이고 있습니다.” 원사웅과 송정립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섬이라면?” 이몽귀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쓰시마......대마도요. 내 짐작으로 조선의 원귀들을 싣고 가는 하야부네는 거기 도착해 있을 것이요.” 일당백 원사웅은 거침이 없었다. “그럼 쳐들어갑시다!” “대마도에 일본 적들이 얼마나 주둔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소?” 일당백 원사웅은 실소를 흘렸다. “얼마가 되더라도 상관없소. 귀혼선은 반드시 임무를 수행하고 우리 조선의 원귀들과 같이 돌아갈 것입니다. 공격합시다.” “이리 무모하게 말입니까?” 원사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저들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바로 기습을 하여서 오오사카로 향하는 하야부네를 탈취해야 합니다.” 송정립이 동조했다. “일당백의 판단도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 귀혼선에는 탄약과 화포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까. 해 볼만 합니다.” 이들은 의기투합(意氣投合) 하여 대마도로 빠르게 전진했다. “귀혼선 전속 항진!!” 격군들의 배 젓는 속도에 따라서 대마도가 눈앞으로 점점 더 다가왔다. “전투 대형으로!!” 비록
[우리문화신문=하진상 기자] 전라북도(도지사 송하진)는 남원시(시장 이환주)와 함께 지리산 자락 운봉고원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 제철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운봉고원 일대에서 30여소의 대규모 제철유적이 집중 분포된 것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금년 4월부터 군산대학교박물관(관장 곽장근)에서 진행 중인 이번 조사는 백두대간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뻗은 산줄기 양쪽에 20여개소와 지리산 달궁계곡 일원에 10여개소의 제철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서, 운봉고원이 장수 대적골 일대의 제철유적과 함께 대규모 가야제철유적의 분포지라 할 수 있어 주목된다. 특히, 바래봉 북쪽 옥계동(현 운봉읍 화수리 일대) 제철유적은 천혜의 자연분지에 슬래그(광물 제련 찌꺼기)의 분포 범위가 500m에 달하고 제철유적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무엇보다 현지조사 때 기벽이 상당한 두꺼운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수습되어 제철유적이 삼국시대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지리산 달궁계곡에 소재한 마한 왕 달궁터 부근의 하점골(현 산내면 덕동리) 제철유적은 운봉읍 공안리, 수철리 제철유적과 함께 유적의 범위가 넓고 유구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
[우리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귀혼선이 진도의 우수영을 출발한지가 이틀은 지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조선 병사들과 명나라 병사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뒤 통에 담아 일본으로 이송한다는 정보를 듣고 무작정 추격해 나선 것은 사실 무리이긴 했다. 열세 번째 판옥선은 명량해전에도 참여하지 않고 바다로 나왔다. 망망대해였으나 군관 송정립과 일당백 원사웅, 그리고 바다 물길의 전문 길잡이 이몽귀 외 6명의 수군들과 나머지는 전원 격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병사라고 할 수 있는 수는 고작 9명이었다. “내 짐작으로는 그들이 아마 쓰시마섬(對馬島)에 정박하고 있지 않을까 싶소. 날짜로 미루어 남원성을 떠나서 부산을 거쳐 갔다면.” 이몽귀는 부산 앞바다를 우회하여 항로를 잡았다. 자칫하여 부산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 수군에게 발각되면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출동한 것이기는 하지만 임무는 수행해야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수 천 명의 원혼을 찾아와야 한다는 이순신의 당부가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 판옥선의 명칭은 귀혼선(歸魂船)이다! 우리 장병들의 혼을 반드시 찾아오라는 의미이다.- “혼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