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9월 7일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 왕족의 무덤 가운데 하나인 사적 제512호 ‘경주 서봉총’ 재발굴한 성과보고서를 펴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서봉총은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서에서 특별히 눈에 띈 것은 무덤 둘레돌[護石]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공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된 것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 유체 곧 뼈, 이빨, 뿔, 조가비 등이 많이 나와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재발굴의 독보적인 성과지요. 이번에 확인된 동물 유체 7,700점 가운데는 조개류(1,883점), 물고기류(5,700점)이 대다수지만 아주 특이하게 바다포유류인 돌고래, 파충류인 남생이와 함께 성게류가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신경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복어도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동물 유체에서 연상되는 복어 요리, 성게, 고래 고기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아주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가운데 줄임)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이는 1905년 오늘(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장지연 선생이 <황성신문>에 〈오늘이여,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고 쓴 논설의 일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 겨레는 함께 통분해 하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오늘은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은 지청천, 차리석 두 분의 제안을 받아 해마다 11월 17일을 전국 동포가 함께 기념할 순국선열기념일(殉國先烈紀念日)로 정했습니다. 이때 11월 17일로 한 까닭을 임시의정원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이 날을 앞뒤로 많은 선각자가 망한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산조(散調)”는 한국 전통음악에 속하는 대표적인 기악 독주곡인데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의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피리산조, 아쟁산조 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산조를 연주할 때는 장구의 반주가 필수적이며, 처음에는 느린 진양조로 시작하여 점차 중모리ㆍ자진모리ㆍ휘모리로 빨라집니다. 우조(羽調, 오음의 하나인 ‘우’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조로 다른 곡조보다 맑고, 씩씩함)와 계면조(界面調,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계로 서양음악의 단조와 비슷함)가 있고, 감미로운 가락과 처절한 애원조(哀願調, 애처롭게 사정하여 간절히 바라는 )의 가락이 있지요. 산조(散調)는 말뜻 그대로 '허튼 가락', 또는 '흩은 가락'에서 유래한 것인데 산조 이전에 있었던 여러 민간 음악이 산조 속에 녹아 하나가 되었습니다. 연주장소, 연주자 등 연주조건에 따라 즉흥적인 감정표현을 중시하는 음악입니다. 산조는 전통 사회의 해체기에 생겨난 것으로 해체기의 "흐트러짐","불안함"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개성미를 추구하여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해방감을 안겨준 곧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민중음악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이 옛날 대마도를 정벌한 뒤, 왜선을 추격하여 전라도 연해변 섬을 돌아보니 거기는 소나무가 무성하나 뭍(육지)과 거리가 멀어서 왜구들이 매양 배를 만들기 위해 오는 것이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마도에 배를 만들 만한 재목이 없으므로 반드시 전라도 섬에 와서 배를 만들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세종실록》 3년(1421) 8월 24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왜구들이 조선 바닷가를 침범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배를 만들기 위한 소나무를 구하기 위함이지요. 이때 보고를 했던 이순몽은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를 모조리 베어 왜선이 오는 않도록 함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세종임금은 "어찌 다 벨 것이 있겠는가?"라며 들어주지 않습니다. 대신 병선을 가지고 들어가서 소나무를 보호하면서 배를 만들도록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이는 소나무가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으며 강도가 높고, 게다가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뎠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소나무는 나무의 속 부분이 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93호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이 있습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지요. 병은 높이 25㎝, 배지름 9.5㎝이고, 잔① 높이 12.5㎝, 아가리 지름 10㎝ 잔② 높이 8㎝, 아가리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아가리 지름 9.5㎝의 크기입니다.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김둥근꼴의의 달걀 모양으로 물을 따르기 편하도록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습니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그릇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파란빛 줄이 있고, 아가리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으며, 손잡이에는 굵은 파란빛 유리를 ㄱ자로 붙였습니다. 손잡이에 금실이 감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무덤에 넣기 전 이미 손상되어 수리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모두 심하게 깨진 상태로 발굴되었으나 다행히 원형을 알아볼 수 있게 복원되었습니다. 병과 잔①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한 모음을 이루었던 것으로 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08년 오늘(11월 11일)은 소설가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 원각사를 세워 자신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 공연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인직이 《혈(血)의 누(淚, 1906)》, 《귀(鬼)의 성(聲, 1908)》, 《치악산(雉岳山, 1908)》, 《은세계(銀世界, 1913)》 따위 신소설을 쓴 작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특히, 《혈(血)의 누(淚)》는 첫 장편소설로서 본격적인 신소설의 효시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배웠지요. 그러나 이윤옥 시인의 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2011》에 보면 “《혈의 누》 작가 이인직이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의 병합을 부추긴 일”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 이인직은 한말 을사5적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리는 친일파 이완용의 비서로 을사늑약의 막후 조정자로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최근 저는 이 수상(이완용을 말함)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삼가 아뢰었습니다. 2천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39년 오늘(11월 10일)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한 날입니다. 창씨개명은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인데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날은 다음 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였는데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으뜸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한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는 조리서들을 보면 동쪽인 경북 영양의 정부인 장계향 선생이 1670년 무렵 궁체로 쓴 필사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서쪽인 충남 홍성의 사운종택에 전해지는 숙부인 전의이씨가 1891년 필사한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한반도 가운데랄 수 있는 충북 청주에는 영동대학교 호텔외식조리학과 지명순 교수가 발굴해낸 《반찬등속》이 있습니다. 먼저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처음 여성이 한글로 쓴 조리서라는 평가를 받지요. 《음식디미방》은 예부터 전해오거나 장계향 선생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과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지금 영양 장계향 선생 생가에는 “음식디미방체험관”이 있으며 여기서 《음식디미방》을 계승하려 노력하고 있구요. 그리고 홍성의 《음식방문니라》 곧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글’이란 책은 화향입주법, 두견주법, 소국주법, 송순주법, 신묘향법 같은 술빚기와 두텁떡법, 혼돈병법, 신검채단자, 석탄병법 같은 떡 만들기 그리고 승기약탕법, 삼합미음법, 증구법(개찜) 같은 요리와 반찬 만들기 따위가 설명돼 있습니다. 숙부인 전의 이씨의 후손인 사운종가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쌀쌀한 바람이 때때로 불며 누른 잎새가 우수수하고 떨어지든 가을철도 거의 다 지내가고 새빨갓케 언 손으로 두 귀를 가리고 종종 거름을 칠 겨울도 몃날이 못되야 또다시 오게 되얏다. 따듯한 온돌 안에서 쪽각 유리를 무친 미닫이에 올골을 대이고 소리 업시 날리는 백설을 구경할 때가 머지 아니하야 요사이는 길가나 공동수도에 모히어 살림이야기를 하는 녀인네 사이에는 ‘우리 집에는 이때까지 솜 한 가지를 못 피어 놓았는데 이를 엇지해….’ 하며 오나가나 겨울준비에 분망하게 되었다.” 위는 <입동과 침채(沈菜)* 준비>라는 제목의 1922년 11월 6일 치 동아일보 기사 일부로 당시의 입동 무렵 분위기를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내일은 24절기의 열아홉째인 입동(立冬)으로 겨울에 드는 때입니다. 이때쯤이면 곧바로 닥쳐올 겨울 채비 때문에 아낙네들은 걱정 속에 일손이 바빠집니다. 그런데 입동 전후에 가장 큰 일은 역시 김장이지요. 지금은 배추를 비롯한 각종 푸성귀를 한해 내내 팔고 있고 김치 말고도 먹을거리가 풍요롭지만, 예전에 겨울 반찬은 김치가 전부이다시피 해 김장은 한해 살림의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입동 무렵에는 김장 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침과 뜸 곧 침구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침구술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인체에 있는 수백 개의 경혈을 침구술을 시술하는 사람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지요. 경험이 부족한 의료진이 시술하면 환자가 위험할 수 있어서 조선 왕실에서는 청동으로 경혈을 표기한 인체상을 만들어 정확한 침구술을 익히는 연습을 했습니다. 침구술을 연습하기 위해 만든 청동인체상 머리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이나 수은을 넣은 뒤, 시술자가 올바른 혈 자리에 침을 놓으면 액체가 흘러나오도록 하였지요.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1747년(영조 23년) 숙종의 왕비인 인원왕후를 치료하기 전 2명의 의관을 뽑을 때 청동인체상으로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근거가 확실한 것입니다. 현재 왕실에서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인체상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이 유일하지요. 국립고궁박물관은 2019년 5월부터 다달이 전시되고 있는 유물 가운데 한 점을 뽑아, 좀 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큐레이터 추천 왕실유물‘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지난 9월 뽑힌 유물인 청동인체상은 유튜브 채널로 9월 23일부터 공개하고 있으며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