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정석현 기자] 동해묘중수기사비는 조선조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던 남공철(1760~1840년)이 1800년(정조 24년)에 찬한 것이다.(『강원도사』에는 1680년에 세워진 것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현재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에 있으며, 일제시대에 내버려졌던 탓에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잘 유지하고 있다. 동해묘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곳은 서해의 풍천, 남해의 나주(지금의 영암)와 함께 우리나라 삼해의 해신에게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임금이 친히 향축을 내려 보내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동해묘중수기사비(東海廟重修紀事碑) 조선 경종2년(1722년)과 영조 28년(1752년)에 양양부사 채팽윤과 이성억에 의해 각각 중수 되었으며, 정조 24년(1800년)에는 어사 권준의 상주와 강원도관찰사 남공철의 주장으로 재차 중수되었으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철폐되었다. 연대:1800년 (정조 24년) 소재지: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그린경제/얼레빗 = 김철관 기자] 박근혜 대통령 독일방문에 즈음해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고지도 전시회가 수도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다. ▲ 지난 12일 오후 4시(현지시각) 하성철 재독독도지킴이단장이 독도 서양고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김철관 재독 독도지킴이단(단장 하성철)은 지난 3일부터(오는 28일까지) 독일 베를린한인회 회의실 벽면에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서양 고지도 16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한 서양 고지도는 하성철(베를린한인회장) 재독 독도지킴이단장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비로 구입한 600여점 중 독도 부근을 한국해와 조선해로 표기한 고지도 16점을 골라 전시했다. 특히 이 가운데 1763년 독일에서 제작된 일본지도에 한국해라고 쓴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지도도 있다. ▲ 독도 표기 서양고지도 김철관 지난 3일 전시장에서 열린 오프닝행사에 하성철 재독 독도지킴이단장을 비롯해 허언욱 주독 대사관 총영사, 윤종원 문화원장, 신성식 베를린 재독독도지킴이 단장 등 관계자 5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일 오후 4시(현지시각) 독일 베를린한인회 사무실에서 만난 하성철 단장은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영 기자] KTV(원장 김관상)는 안중근 의사 순국일인 오는 3월 26일(수) 낮 1시, 안중근 의사가 주창했던 '동양평화론'을 바탕으로 안 의사의 사상과 업적을 되새기고 바람직한 한중일 관계를 짚어보는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동양평화론』을 방송한다. ▲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1층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 ▲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1층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에는 오전 9시 30분에 멈춰선 시계가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시각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2014년, 일본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을 두고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망언을 내뱉고, 일본 외무성은 우리나라와 중국에 “매우 유감”이라며 항의를 표했다. 오는 3월 26일은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차가운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104주기가 되는 날이다. 우리 독립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의 항일운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영웅으로 꼽히는 안중근 의사. 그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옥중에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
[그린경제/얼레빗 = 전수희 기자] ▲ 위안부 소녀상 뒤의 죄악상이 낱낱이 적혀있다. (어제 24일 찍은 사진) 내일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를 맞는 날이다. 안 의사는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의 죄를 15개조 항으로 또박또박 짚어 나갔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왕의 아버지를 죽인 죄다. ▲ 남산에 있는 이등박문의 죄악을 적은 돌비석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무덤의 부장품을 꺼내 팔아먹기 위해 선조의 무덤에 손을 대는 일을 하는 후레자식은 한국 정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일제강점기에 그런 후레자식이 있었다. 1905년 초대 조선 통감 자격으로 조선에 부임한 이등박문이란 자가 바로 그자다. 1905년 이등박문은 통감자리에 앉자 이미 조선에 와있던 일본인 도굴꾼들과 손을 잡고 맨 먼저 손을 댄 것이 고려청자다. 이등박문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 몰려 있는 왕후, 귀족들의 분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덤 털이에 일부 마을사람들이 저항하면 총으로 위협을 가했다. ▲ '청자거북이형연적'은 동경국립박물관에 있었던 고려청자로 이것은 이등박문이 일본 황실에 보낸 103점 가운데 하나다. 한일조약 때 되돌아왔다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등박문은 도굴꾼들을 매수하여 무덤을 마구 파헤쳐 고려청자를 파낸 뒤 명치왕과 황족들에게 조선통감의 위세를 자랑하고자 선물했다. 심지어는 골동품상을 통째로 매수하여 고려청자를 입수한 뒤 30점에서 50점을 한 번에 선물하기도 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에 이르고 있다고 《잃어버린 조선문화유산'失われた朝鮮文化遺産'》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생전에 시인이라 불린 일이 없고 시집 한권 발행한 적이 없는 시인 윤동주. 그러나 그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대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은 27살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생을 마감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이었지만 한글로 시를 쓰는 것이 눈에 거슬려 잡아 가두면서 그의 일본유학시절의 노트, 일기, 장서, 작품 등도 함께 압수되었다. 안타깝게도 압수된 이래 그의 작품과 장서들은 행방불명 상태다. ▲ 1943년 우지가와 강변 다리에서 동지사대학 친구들과 앞열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 시인 1942년 2월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学) 영문과로 편입학을 하게 되는데 릿쿄대학에서는 2010년 4월부터 윤동주장학금을 만들어 일본에 유학 중인 윤동주 후배들에게 매월 장학금을 주고 있다. 좀 더 릿쿄대학의 시인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에서 소개하는 윤동주에 대해 들어보자. 윤동주는 민족 수난의 시대에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의연히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시로 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인간은 그것이면서 그것이 아니다고 우기면서 사는 사랑 고집이다 -사랑과 인생 가운데 신시성- 《한흙 제54호》에서 신시성 시인은 인간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런가 하면 김리박 시인은, 어릴 때 구들방서 먹던 찬국수/ 어머니 손맛 묻은 그 맛은 어디 갔고 / 옛 동무 하나만 남아 둘이서 호르르 라는 시로 고향의 향수를 읊고 있다. ▲ 한흙(大地) 표지 재일한국문인협회 회장인 김리박 시인이 주축이 되어 만드는 문예지 《한흙》은 1992년 창간이래 2013년 12월로 스물한 해를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어엿한 처녀로 성장했다. 기자가 《한흙》을 만난 것은 5년 전이다. 그때 기자는 교토 속의 한국문화답사 취재 길이었는데 교토에서 한국인보다 더 철저히 우리 토박이말을 살려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토 후시미에 있는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의 서재에는 한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 관련 책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한글과 한국어 관련 책이 특히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이는 선생의 한글사랑을 여실히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그걸 입증하듯 선생의 직함 또한 대한민국 한글학회 간사이지회지회장 (関西支会
[그린경제/얼레빗 = 이무성 한국화가] 여기는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산다는 황거 앞이다. 도쿄 관광 코스에는 꼭 들어 있다는 필수코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관광만 할 수 없는 유적지다. 앞에 보이는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1924년 1월 5일 관광객 틈에 몸을 숨긴 채 김지섭 의사는 황거를 향해 수류탄 3개를 던졌다. 당시 습기를 머금은 수류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었던 거사 장소인 것이다. 가까운 곳의 사쿠라다몽(櫻田門, 고려문) 곧 황거로 들어가는 문에서는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이 있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을 우습게보았겠지만 이 두 지사의 거사는 그야말로 조선인의 기개를 여지없이 보여준, 그래서 일본 경찰과 일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쾌거였다. 한국인들이여 황거 앞 이중교와 사쿠라다몽에 가거든 우리의 영웅 김지섭과 이봉창 두 지사를 꼭 기억하라!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앞 줄임)봄까치꽃은 그 크기가 아주 작습니다.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입니다. 푸른빛이 도는 연보라색의 꽃은 가냘파 보이기까지 합니다. 작고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매서운 겨울을 났을까? 또 땅이 풀리자마자 꽃을 피워 남보다 먼저 새봄을 알려줄 생각을 했을까? 봄까치꽃, 이름이 참 예쁩니다. 그런데 봄까치꽃의 원래 이름은 큰개불알풀이라 합니다. 꽃이 지고 난 후 씨앗이 개불알을 닮았다하여 그렇게 불렸다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사람들은 그 이름이 민망하여 예쁜 꽃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 줄임)” 위 글은 오마이뉴스 3월 14일에 전갑남 기자의 글의 일부다. 그는 봄을 맞아 “보라색 작은 꽃이 관심을 달라고 하네요”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곳에 보면 “씨앗이 개불알을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오늘은 이 꽃 개불알꽃에 대해 말해보자. 먼저 국립국어원의《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보면 “개불알꽃 :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25~4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다. 5~6월에 붉은 보라색 꽃이 개의 불알 모양으로 줄기 끝에 한 개씩 핀다.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산이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일본군 장교가 딱 버티고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히죽거리기까지 했지요.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강압적으로 나를 끌고 침대로 갔습니다. 나는 말했죠. '절대 이런 짓을 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가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마. 정말 죽이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칼을 뽑았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꼈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집어던지고는 내 옷을 모두 찢어버리고 잔인하게 강간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어요. 나는 고통이 그렇게 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방을 나갔고 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욕실에 가서 다 씻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모든 더러운 것을. 그저 다 씻어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공포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마치 전류처럼 몸속을 파고 흘러들거든요. 공포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있었죠. 나는 밤이면 그 공포를 여기 내 응접실에 앉아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날이 어둑해질 때쯤이면 소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