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의 전직 외교관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잔혹사를 간직한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에 관한 책을 출판한다. 오는 10일 출간 예정인 《기린(평화 시대를 상징하는 상상 속 동물)이여》라는 귀무덤 관련 일본어 서적을 출판하는 주인공은 아마키 나오토(天木直人ㆍ73) 전 주 레바논 일본대사다. 그는 “일본이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미래를 향해 (한일이) 협력해 나가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책을 출판했다."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이 (역사를)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연합뉴스에 보도된 이야기입니다. 한일 간 사이가 극도로 험악해진 상황에서 저런 양심적인 일본인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마키 씨가 말하는 것에 대해 결정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토의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며, 이를 코무덤(鼻塚ㆍ비총ㆍ하나즈카)으로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코무덤이나 귀무덤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를 자른 것과 코를 자른 것은 잔학성 면에서 견줄 수가 없는 것이며, 일본 오사카성(풍신수길이 쌓았고, 지금 그에 관련된 전시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은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을 전혀 범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옷감 몇 자, 동전 몇 잎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호연지기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극히 주의하도록 하라” 이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전남 담양에 가면 그 유명한 명승 제40호 소쇄원이 있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조선전기 문신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출사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곳으로,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입니다. 소새원을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먼저 광풍각(光風閣)이 있고 그 위에 제월당(霽月堂)이란 조그만 집이 있습니다. 광풍각은 소쇄원 집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지은 것으로 너럭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떡본 또는 떡손ㆍ병형(餠型)이라고도 하는 떡살은 누르는 면에 오목새김(음각)이나 돋을새김(양각) 무늬가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예쁜 무늬가 생깁니다.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누르면 되는데 이렇게 찍은 떡은 어느 정도 굳으면 그 무늬가 선명하게 나타나지요. 무심한 절편에 어떤 뜻을 가진 무늬를 찍어 넣어 그저 떡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이 됩니다. 고려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진 떡살은 재질에 따라 나무떡살과 자기떡살로 나눕니다. 단단한 소나무, 참나무, 감나무, 박달나무 따위로 만드는 나무떡살은 1자 정도의 긴 나무에 4∼6개의 각기 다른 무늬를 새긴 것입니다. 한편, 사기, 백자, 오지 같은 것으로 만드는 자기떡살은 대개 보통 5∼11㎝ 정도의 둥근 도장 모양으로, 손잡이가 달려서 잡고 꼭 누르게 되어 있지요. 특히 궁중에서 쓰던 사기떡살은 고급스러운 백자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떡살의 무늬는 선원, 꽃당초, 고기, 나비, 거북의 등딱지, 문구름, 천도, 석류, 박쥐, 포도, 국화 같은 꽃과 동물들이 많은데 그밖에 기하학문, 십장생문, 칠보문, 태극문, 격자문, 창살문, 길상무늬 따위도 많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주변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착해도 다른 착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법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법이란 건 여간 어렵지 않아서 일반인은 다가서기 쉽지 않지요. 그래서 현대사회에선 변호사가 일반인을 대신해서 법에 관한 업무를 맡아주고 있습니다. 다만, ‘전관예우’라던지 하는 것을 앞세워 정의롭지 못하게 소송이 끝나는 수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어땠을까요? 법 정보가 모두 한자로만 되어있던 조선시대 역시 공부를 한 사람을 뺀 일반 백성은 다른 사람이 대신 법 관련 일을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을 ‘외지부(外知部)’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식 관원이었던 도관지부와 달리 외지부는 관원이 아니면서도 소송인에게 대가를 받고 소장을 대신 작성해주거나 법률 자문을 통해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품삯을 받고 대리소송을 하기도 했고, 사람을 부추겨 소송을 일으키거나, 법률 조문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옳고 그름을 뒤바꾸어 송사를 어지럽히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임금이 내리는 문서까지 위조하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맑은 물가 습기 많은 자리 몇 방울 물 흐르는 바위틈에 이끼를 벗하고, 작년에 떨어진 낙엽도, 마른 솔잎도 몇 개 어우러져 피는 물매화 혼자라고 외로운 것은 아니다. 먼 인적 아랑곳없이 쑥부쟁이 개미취도 지켜볼 뿐” 최상만 시인의 시 <물매화>입니다. ‘물매화’, 먼 인적 아랑곳없이 혼자라고 외롭지 않게 피어있지만,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정원을 가꾸던 선녀가 땅에 떨어져 꽃이 되었다고 하지요. 물가에서 자라며 매화를 닮았다 하여 “물매화”인 이 꽃은 풀매화, 풀매화초라고도 합니다. 특히 물매화 가운데 암술에 빨간빛이 묻어있어 별명이 “립스틱물매화”인 녀석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어 사진작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물매화는 쌍떡잎식물로 여러해살이풀이지요. 산자락의 볕이 잘 드는 습지에 자라며, 키는 10~40cm 정도로 자그마한 녀석입니다. 꽃은 7월에 피기 시작하여 9월 중하순 절정기에 달합니다. 꽃의 지름은 2∼2.5cm이고, 꽃받침조각은 5개이며 긴 타원 모양의 녹색이지요. 꽃잎은 5개고 길이 7∼10mm의 넓은 달걀 모양입니다. 한방에서는 뿌리만 빼고 꽃과 줄기, 잎 모두 매화초(梅花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아한 모습의 조선 사대부가 여성은 아침마다 얼레빗과 참빛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습니다. 이때 머리를 빗는 도구들은 빗접이란 도구에 담아 두었지요. 빗접은 모양에 따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빗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창호지 따위를 여러 겹 붙여 기름에 절여서 만든 소첩(梳貼)과 나무로 짜서 만든 소갑(梳匣)이 있습니다. 또 빗접 자체가 고비 겸용으로 만들어져 벽에 걸어둔 것을 빗접고비라 합니다. 빗접은 쓰임새에 따라 크고 작은 서랍이 여러 개 달립니다. 또 꾸민 방법으로 나누면 먹감나무ㆍ느티나무ㆍ오동나무 따위로 만들어 나뭇결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개를 붙여 화려하게 꾸민 “나전빗접”, 쇠뿔로 장식한 “화각빗접”이 있습니다. 그 무늬는 대개 십장생ㆍ원앙ㆍ연꽃ㆍ산수 따위로 여성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것들입니다. 빗접은 거울이 없으므로 면경(面鏡, 주로 얼굴을 비추어 보는 작은 거울)이나 좌경(座鏡, 앉아서 볼 수 있게 경사지게 만든 거울)을 따로 있어야 하지요. 항상 경대와 함께 머리맡에 두고 썼던 빗접은 빗빗솔(빗살 사이에 낀 때를 빼는 솔)ㆍ빗치개(가르마를 타거나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 쓰는 도구)ㆍ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년 더위는 넘치고 가혹했는데 미친듯한 장마가 더 때려서 고생했네 세월이 어찌 바뀌지 않는가 했더니 속이지 않고 백로가 찾아 왔구나. 이우현 시인의 소박한 시 “백로날에 한편”이라는 시입니다. 정말 세월이 어찌 바뀌지 않는가 했더니 정말 속이지 않고 백로가 찾아 왔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열다섯째로 흰 이슬이 내린다고 하는 백로(白露)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때만 되면 편지 앞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시고”라는 인사를 꼭 넣었습니다. 그것은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절기는 포도가 제철일 때여서 그런 것이지요. 포도는 예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생각해서 맨 처음 따는 포도는 사당에 고사를 지낸 다음 그집 맏며느리가 통째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포도를 먹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들었지요. 또 이때쯤 되면 포도지정(葡萄之精)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포도를 먹일 때 한알 한알 입에 넣고 씨와 껍질을 발라낸 뒤 아이의 입에 넣어주던 정을 일컫습니다. 특히 백로 때는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집니다.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전으로는 그 값어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무가지보,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歲寒圖)>가 지난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 품에 안겼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 올곧은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문인화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스승 추사를 위해 그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은 새롭게 들어온 중국의 문물 자료를 모아 스승에게 보내주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추사가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선물한 것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그런데 이 세한도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일본인 수집가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서예가 손재형은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쿄의 후지즈카 집에 100일 동안 날마다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며, 세한도를 내달라며 간곡히 청을 했지요. 그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라며 돈 한 푼도 받지 않고 내주었다는 아름다운 일화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손재형이 세한도를 받아 낸 3달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려 참으로 다행스러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 어느 집이나 다듬잇돌과 다듬이방망이가 있었습니다. 하얀 홑청이 적당히 마르면 얌전히 접어서 다듬잇돌 위에 얹고 두드립니다. 고된 시집살이를 하던 아낙들은 어쩌면 마음을 몰라주는 낭군이 미워서 두드렸을지도 모르지요. 다듬질할 때는 혼자 또는 다듬이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양쪽에 앉아서 하는데 둘이서 할 때는 주로 모녀(母女)나 고부(姑婦) 또는 동서(同壻)끼리 방망이가 부딪치지 않도록 서로 호흡을 잘 맞춰서 했지요. 다듬잇돌은 옷감ㆍ이불감 등의 천을 다듬을 때 밑에 받치는 살림도구로 화강암ㆍ납석ㆍ대리석 따위로 만들며, 박달나무ㆍ느티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도 만듭니다. 두꺼운 직사각형 모양으로, 크기는 보통 길이 60cm, 높이 20cm, 너비 30cm가량입니다. 윗면은 반들반들하게 하고 밑면보다는 약간 넓습니다. 밑면의 양쪽에는 손을 넣어서 들어 옮길 수 있도록 홈을 팠습니다. 다듬이 도구에는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한 틀이 되며, 방망이는 두 개가 한 틀입니다. 명절이나 혼사(婚事)가 가까워질 때, 그리고 겨울옷을 마련할 때면 집집이 다듬이질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방망이질 소리는 밤중까지 소리가 들려도 이웃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나이인 1919년 9월 2일 저녁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져 3ㆍ1만세 운동의 열기를 되살렸지만 이 일로 끝내 순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강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뒤 3ㆍ1만세 운동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그때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여,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8월 4일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