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한국은 아직도 자주독립의 길에 놓여 있고 그 완결은 분단상황이 해소되고 어떤 강대국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중립국을 이룰 때 비로소 달성될 것이다.”라는 신념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한 사람은 유길준(1856-1914)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김옥균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직전인 1884년 11월 3일 고종에게 “서양의 네델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의 나라처럼 빨리 독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벨기에와 스위스는 당시 영세중립국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뒤 무려 3,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사실상 조선을 점려하다시피 하자 김옥균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김옥균은 주변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안으로서 중립국화를 생각했던 듯하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 청의 간섭이 심해지고 영ㆍ러의 대립으로 영국이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위기의식은 더욱 심화하었고 따라서 중립화 추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던 것 같다. 중립화 방안은 그가 표방하는 삼화주의(한중일 삼국의 우호 협력체제)와 표리를 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앞서 인용한 일본인의 김옥균론에 보이는 오류를 지적해야겠다. 김옥균이 ‘18~19세 무렵 대원군에게 알려져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진급을 거듭하여 25~26살 때에는 호조판서에 나아갔다.”라는 것은 물론 오류다. “1880년(명치 13년) 불교 연구를 구실삼아 처음으로 일본에 왔다.”도 오류이다. 이는 아마 1879년 일본에 밀입국한 이동인 스님을 착각한 것일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쿠자와 유기치를 맨 처음 찾아낸 조선인은 이동인이다. 시기는 1880년이었다. 후쿠자와 유기치에 대해 김옥균 등 개화파 동지들에게 맨 처음 알려준 사람도 이동인 스님이었다. 이동인은 1881년 봄 한양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그와 후쿠자와 유기치의 교류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김옥균과 유기치의 교류는 긴밀하고 깊어졌다. 후쿠자와 유기치와 김옥균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김옥균을 경솔한 친일파로 보는 시각의 근저에는 ‘김옥균이 생각 없이 후쿠자와 유기치에게 조종, 이용당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만을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일본의 국익을 위해 조선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옥균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북한의 시각과 평가도 다양하다.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서양인의 평가들도 다수 전해 온다. 오늘은 북한의 평가와 일본의 기록 하나를 보겠다. 먼저 김일성은 1958년 3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워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력사가들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다 부르죠아 혁명운동이 있었는데 왜 우리나라의 력사에만 그것이 없는가고. 중국에는 강유위나 량계초와 같은 부르죠아 혁명가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있다고 하면 김옥균을 들 수 있는데 …친일파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김옥균이 친일파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 다 아는 바와 같이 일본은 동양에서 제일 먼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김옥균은 자본주의 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개명시키려 했는데, 훗날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니 결국 그가 친일파로 규정된 셈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여간 토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한편 일본 흑룡회에서 1933년 펴낸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에서는 아래와 같이 김옥균을 선각자로 소개한다. “자(字)는 백온(伯溫), 고균(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나더러 누가 우리 역사상 혁명가를 단 한 명만 꼽으라 한다면 김옥균(1851-1894)을 꼽고 싶다. 김옥균처럼 혁명가의 모든 요소를 한 몸에 지닌 이는 드물지 않을까 한다. 알면 알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사상가였고 선(禪) 수행가였으며 불꽃 같은 혁명가였다. 무엇보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한 초인이었다. 게다가 글씨, 노래, 화술, 바둑 등 사람을 홀리는 재주와 매력이 탁월하였다. 그 때문에 많은 일본 여성이 그를 흠모하였고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런 기록들이 나라 안팎에 흩어져 있다. 여태 두서없이 김옥균에 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해왔다. 앞으로도 두서없는 이야기를 이어가 보련다. 요즈음 창비 출판사에서 ‘한국사상선’을 펴내고 있는데 그 17번째(2024)가 《김옥균/ 유길준/ 주시경》이다. 여기 소개된 김옥균을 참고하여 짚어본다. 김옥균이 망명 중에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 일부다. 이제 조선을 위하여 도모하건대 청국은 본래 믿지 못할 것이요 일본도 또한 그러하여 이 두 나라는 각기 자기 집 유지에 여력이 없는 모양이온데, 어느 겨를에 타국을 도우리까…. 우리나라는 오직 밖으로는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전번에 소개한 일본인 스나가(須永)는 김옥균의 진정한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은 절해 고도 오가사와라 섬에서 인편으로 스나가에게 붓글씨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곁들였다. 「小笠原島夏日、為試病腕、寄贈知我者」(오가사와라 섬에서 여름날, 병든 팔을 시험해보기 위해 ‘나를 아는 이’에게 보낸다.) 김옥균은 스나가를 ‘나를 아는 이’이라는 뜻의 ‘知我者’(아지자)라 불렀다. 이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시경(詩経)》에 나오는 것인데 시경에는 이 단어에 이어서 「謂我心憂」(위아심우: 내 마음을 걱정하다)가 나온다. 스나가의 일기에는 오가사와라 고도에서 보낸 김옥균의 고통이 담겨 있다. 김옥균을 방문하고 돌아온 유혁로가 전해준 김옥균의 실황이다. “위장병과 류마티즘은 아직 낫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배앓이까지 앓고 있답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개미와 독충, 뱀의 습격을 받습니다. 극히 쇠약하여 안색이 초쵀하고 몸은 말랐습니다… ” 스나가는 1888년 10월 13일 치 일기에 츠지 카쿠자부로(辻覚三郎)의 사망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누구길래? 바로 김옥균이 혁명에 실패한 뒤 제물포에서 일본배 치토세 마루호(千歳丸)를 탔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운영의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이 불거져 세상이 한바탕 떠들썩했다. 1886년 7월 13일 김옥균은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모토로부터 통지문을 받는다. 15일 안으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 추방명령이었다. 당시 김옥균은 치외법권 지역인 요코하마 프랑스 조계에 묵고 있었다. 그곳의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구명운동을 꾀할 생각이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쓰이 여관으로 퇴거시킨다. 연금조치다. 김옥균은 미국행을 서둔다. 여비마련을 위해 애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2주일만 더 연기해 줄 것을 외무성에 요청한다. 김옥균은 일본 측에 “다음번 미국 우편선의 출범일”에 출국하겠노라고 통보한다. 막상 그가 미국으로 떠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정부가 방침을 돌연 바꾼다. 오가사와라 고도로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유배를 보낸다는 게 아닌가. 분기탱천한 김옥균은 항의함과 동시에 외국 공사들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보낸다. “원래 본인은 15일 이내로 일본 영토를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받고 미국행을 준비중이었지만, 여비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갑자기 오가사와라로 추방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통보했습니다. 놀라움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6년 초 일본이다. 지운영이 고종의 위임장과 단도를 소지하고 일본에 와 있다. 김옥균을 암살하려 함이다. 김옥균의 심복 유혁로 등 세 사람은 지운영에 접근하여 위임장과 단도를 손에 넣는다. 그런 다음 경시청으로 가서 위임장과 단도를 증거로 제시하며 지운영을 고발한다. 경시청은 아연 긴장한다. 우선 김옥균에게 동경을 떠나도록 조치한다. 김옥균은 요코하마의 영국 조계지에 있는 그랜드호텔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을 사로잡을 방안을 알려준다.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찾아간다. 지운영에게 김옥균이 동경 체류를 금지당하여 요코하마로 이동했다는 것, 요코하마에는 치외법권이 있어 일본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김옥균을 암살하기 편리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꼬임에 빠진 지운영은 요코하마로 들어간다. 그의 동정을 유혁로가 일본 경시청에 밀고한다. 거리를 두리번거리는 자운영을 일본 경찰이 체포한다. 구속된 지운영은 암살 밀명을 받고 도일한 사실을 자백하고 만다. 1886년 4월 29일 김옥균이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온다. 편지에서 김옥균은 지운영의 거동을 알리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운영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이다. 1851년 생으로 김옥균보다는 한 살 아래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고 개화 선각자 강위(姜瑋)에게서 시문을 배웠다고 한다. 한때 외무부서의 주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옥균은 그의 상사였다. 그러니까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개화에 눈을 뜬 지운영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술을 배워 돌아온 뒤 서울에서 사진관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가 갑신정변 뒤 섬뜩한 글 한 편을 쓴다. 이름하여 ‘지씨필검(池氏筆劍)’. ‘필검’이란 문자 그대로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검(殺人劍)을 뜻한다. 개화파의 ‘죄상’을 험하게 고발한 이 글이 조정에 알려지자, 지운영은 천하에 둘도 없는 관직명을 받는다.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 ‘바다건너 역적을 잡아 오는 사신’이라는 뜻이겠다. 이 희한한 직명과 함께 고종의 위임장과 함께 5만 원의 공작금까지 받는다. 그뿐이 아니다. 날이 퍼런 단도까지. 지운영이 일본에 잠입한 것은 1886년 초. 그는 고베로 가서 장갑복이라는 사람을 여러 차례 만나 김옥균의 동정을 파악한다. 그해 3월 지운영은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만남을 청한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2월 초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몸을 피한 뒤 김옥균은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조선은 자객을 밀파하여 김옥균을 제거하려 한다. 이때 장은규와 송병준이라는 자가 자청하고 나선다. 이 자들은 누구일까? 장은규는 의화군을 낳은 장 상궁의 오라비. 장 상궁이 민비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쫒겨나면서 곤경에 빠진 집안을 일으킬 목적으로 김옥균 암살을 자원한 것이다. 한편, 송병준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민씨 집안의 식객 노릇을 하던 중 개화파와 인연을 맺었다. 1882년 9월 김옥균과 박영효가 방일할 때 안내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김옥균과 아는 사이다. 1885년 9월 강은규와 송병준은 고종의 위임장과 자금을 받아 일본에 잠입한다. 김옥균에게 접근한 송병준이 넌지시 귀국을 종용한다. 국내에 들어가 동지들과 함께 병사를 모집하여 도성을 공격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김옥균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는 다른 길을 찾는다. 갑신정변 때 주동자들에 의해 영의정에 추대된 바 있는 이재원이 강화도 수령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김옥균은 편지를 쓴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내용이다. 곧 일본내 급진세력과 손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혁명가 김옥균을 제거하려는 조선 정부의 노력은 집요하고 절박했다. 그만큼 김옥균이 그가 처한 위험은 가팔랐다. 이번 글에서는 그 대목의 첫머리를 들추어 보려 한다. 1884년 12월 초 혁명에 실패한 김옥균 일행은 제물포(인천)로 황망히 몸을 피한다. 항구엔 치도세마루라는 일본 여객선이 정박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일본배. 천신만고 끝에 배에 도착했지만, 동행한 일본인들이 김옥균 일행의 승선을 가로막는다. 당장에라도 조선의 체포조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피가 마르는 상황이다. 그 순간 구원의 손길을 뻗힌 이는 일본배의 선장 쓰지 쇼사부로. 김옥균 일행을 밤중에 몰래 승선시켜 선창에 숨겨 준 것이다. 다음날 12월 9일 영의정 심순택의 지시로 묄렌도르프(독일인으로 외교부 차관격이었지만, 실제로는 전반적인 외교업무를 관장)가 이끄는 조선군이 제물포항에 들이닥친다. 묄렌도르프는 일본 공사 다께조에게 반역자들을 당장 넘겨달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다께조에는 김옥균과 한양에서 같이 도망하여 승선해 있는 상태다. 말하자면 구명선을 같이 탄 처지다. 김옥균 일행은 설마 다케조에가 자신들을 조선군에게 넘겨주리라고는 상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