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린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라톤이 아닌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의 터널이 아니라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 하니까요. 하루에 햇살이 비추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린 모두 유한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은 정해진 길을 달리는 경주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정해진 길이 없는 미지의 탐험입니다.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마주하기도 하지요. 그러니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삶의 기쁨을 만끽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맛난 것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자연을 만끽하며 산책하는 등 작은 실천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폭풍우가 지나가야 찬란한 무지개가 뜹니다. 맑고 청명한 날씨에서는 무지개가 만들어지지 않지요. 그러니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망치를 들고 다니는 사람에겐 못만 보이게 마련이고 화분을 들고 다시는 사람에겐 꽃만 보이게 마련이며 사랑을 품고 다니는 사람에겐 좋은 것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좋은 것만 골라 보기에도 시간이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옛날엔 종다리(대오리나 싸리 따위로 엮어 만든 작은 바구니) 들고 앞 개울만 나가도 가재가 지천으로 있었습니다. 요즘엔 전기의 영향인지 아니면 1급수가 적어서 그런지 가재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엊그제 두륜산 중턱에서 가재를 보았으니 유년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긴 것이 비슷하니 같은 편이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게걸음과 가재걸음은 차이가 큽니다. 게는 오직 옆으로만 걸어 다닙니다. 어미 게가 나처럼 똑바로 걸으라고 시범을 보일지라도 그 똑바름이라는 것이 옆으로 걷는 것이지요. 그에 비하여 가재는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닙니다. 그러다가 위험에 직면하면 꼬리를 이용하여 쏜살같이 뒤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합니다. 가재가 뒤로 가는 모습은 역행하고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최적의 선택입니다. 어쩌면 가재걸음이 아니라 가재의 회피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서핑이나 사진 자료를 통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재의 생활상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재도 아가미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을 살면서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종래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호화로운 묘지 속에 묻히거나, 이름 없는 풀섶에서 인멸되거나, 한 줌 재로 바람에 날려가거나, 영생원 한 귀퉁이의 유골함에 담겨 보관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아무리 전생과 후생을 논하고 사후의 인생을 논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삶도 다 알 수 없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으로도 알 수 있지요. 또한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건 강물처럼 인생을 본질적으로 멈출 수 없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 역시 도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강물 같은 인생에서 우린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지요 우린 바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