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8) 선생이 사람을 가르칠 때는 각각 그 재능을 살펴서 그것을 도탑게 했다.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위하여 의문 나는 뜻을 분석하여 말이 미세한 곳에까지 파고들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하게 의문이 풀린 뒤에야 그만두었다. 1561년은 조선 교육계에 특별한 일이 일어난 해였다. 퇴계 이황이 이끄는 도산서당이 안동의 청량산 줄기에 세워졌고, 남명 조식이 이끄는 산천재가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 세워졌다. 이 두 학교는 당대의 으뜸 사립대학으로 나라를 지킬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이 되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인 김경수가 쓴 이 책, 《남명 선생의 삶과 가르침》은 조선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였던 남명 조식의 삶과 교육관을 조명한 책이다. 40년 가까이 남명학을 연구한 지은이는 사회에 남명 정신이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간 공부한 내용을 쉽게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은 독보적인 학문적 경지를 이룩해냈다. 무엇보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단성소>, <무진봉사> 등의 상소를 올려 천지를 진동케 했고, 비록 벼슬에 직접 나아가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사십년 동안 쌓인 찌꺼기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씻어 버리리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그래도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 선생이 1549년에 제자들과 거창 신원면의 감악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라고 합니다. 남명은 감악산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씻으며 이 시를 지었다고 하지요. 조선의 양반이 홀라당 벗고 계곡물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고, 아마 탁족(濯足) 곧 물에 발을 담그고 이 시를 짓지 않았을까요? 남명은 16세기 조선의 대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학자가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다니요! 그만큼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유학자의 시치고는 좀 과격하지 않나요? 그러나 항상 은장도 같은 칼을 갖고 다니면서 때로는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기까지 하며, 또 자신이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옷깃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도 달고 다녔던 남명이라면 능히 이런 시를 지을 만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