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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My way’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46] 죽음 앞둔 노신사 삶 회고

[한국문화신문 =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예전 기자 출신의 어느 언론인이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하여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과거에 언론사 사장이 총리를 지낸 적은 있지만 기자출신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때 지명된 후보자가 국회인준절차를 통과한다면 최초의 기자출신 총리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총리후보자의 학력과 경력, 정치성향에 촉각을 세우지만, 38년간 외길인생을 걸었다는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이 여기서 단절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사실 평생 한우물을 판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분야건 그 방면에 명망가가 되면 정치권에서 그냥 두질 않고 꼬드기기 때문이다.  

외길인생이라고 꼭 다른 삶보다 비교우위에 있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자기만족도는 좀 더 높지 않을까? 

필자가 DJ계에 입문한 지도 달걀 넉 줄에 해당하는 햇수가 갔다. 하지만 미몽 속을 헤매다 세월만 보냈다는 느낌이다. 각 분야마다 태산북두 같은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겠으나, 필자가 소속된 한국 방송 디스크자키 협회최동욱 회장이야말로 DJ로서 일가를 이룬 거성이다.  

1960년에 KBS에 스크립터로 입사하면서 그의 음악인생이 시작된다. 국내 최초로 팝 칼럼과 가요평론을 게재하였고 이백천, 이호로, 황문평, 정홍택, 전우 등과 함께 경음악 평론동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63년에 동아방송 PD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64년에 탑튠 쑈라는 프로그램으로 한국 최초의 디스크자키가 되었다. 

또한 디쉐네음악 감상실에 출연하면서 감상실 전성기를 견인하였다. 당시 종로통에 산재한 음악 감상실에서 이종환, 박원웅, 김광한 같은 스타 DJ들이 배출되었다.  

최 회장이 DJ로 데뷔한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36년에 태어났으니 팔십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매일 4시간짜리 생방송을 온라인을 통해 송출하고 있으며, 그의 스튜디오를 가득채운 수 천 권의 원서들이 그가 걸어온 후회 없는 인생여정을 대변해 준다. 

오늘은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노신사의 삶의 회고를 감상하며 후회 없는 삶에 대하여 곱씹어본다. 

   
▲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 음반 표지
,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졌군
내 생의 마지막과 마주하는 이 순간
친구여,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인생 하나는
똑 부러지게 살았지
난 충만한 삶을 살았고,
여기 저기 안 가본 곳이 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난 언제나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라약간은 있었지
그런데, 사실 몇 개 되지도 않아
난 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왔고
해야 할 땐 끝장을 봤지
난 전도 유망한 길을 가려했고
샛길로 빠질 때는
조심조심 나아갔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난 내방식대로 해냈다는 것이야
(후략) 

우리나라 중년들에겐 Frank Sinatra=My way라는 등식이 각인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이다. 

우리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1930년대에 데뷔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프랭크의 노래가 원곡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샹송이다. 끌로드 프랑수아가 부른 Comme D’abitude를 영어로 개사하여 1969년에 발표한 것이다. 프랭크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