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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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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나지 못한 꽃, 어둠 속에 묻힌 별

손석우 작곡가가 손짓한 태민호, <내 이름은 방랑자>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0]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 가녀린 허리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희뿌연 하늘에 눌려서도 아닌 것 같고, 둘러매고 있는 전기기타의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비실비실한 체질이란 게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네 마음 안다. 고맙다. 그저 바람 따라 떠다니다 때 되면 갈란다.“ 금방이라도 양회가루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낮은 구름에 온갖 매연까지 뒤섞인 바람이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실루엣은 대기에 스며들고 말았다. 태민호! 어쩌면 그에게는 태민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러니까 장효민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집은 비록 서울의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문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번듯한 양옥은 아니지만 여섯 식구 궁둥이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다 문간채의 방 두 개는 세를 놓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다. 대학도 그가 음악에 빠져 안 간다고 버텨 그렇지, 돈이 없어 못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60년대의 가정치곤 중류 이상은 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서울의 명암을 간직하고 흐른 '청계천'

60년대를 풍미한 가수 ‘남일해’ <청계천의 밤>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9]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최진희 <천상 재회>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8]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새벽잠에서 깨어난 현영감의 마음은 지푸라기 헝클어뜨린 것 같았다. 단 한 번 본 사람이 그렇게 또렷하게 꿈에 나온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만증에다 하지정맥류로 고생하는 할멈을 부축해 오줌을 뉘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 껍질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기만 했다. 창에는 성에가 고사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다시 볼 일이야 없겠지만 전화번호라도 받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멈 몰래 빠져나와 거실을 서성이며 조반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 청소이시더. 박 씨 양반 댁이니껴?” “아,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 당부도 있고 해서 삼우가 지나면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박 씨. 야위어 보여도 단단한 구석이 느껴지던 사람.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러쓰는 작은 손이 맵차 보이던 사람. 얄궂은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매제가 될 뻔했던, 눈꼬리가 유난히 부드러운 사람. 그가 현영감을 찾은 건 두어 달 전 가을 거두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 여기가 월외리가 맞습니까? 아까부터 낯선 이가 집집이 다니며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현영감네 차례까지 온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케니 로저스에게 부ㆍ명예를 준 <레이디>

또다시 겨울, ‘레이디’ 같은 사랑을 하던 청년의 이야기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7]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좀 먹어둬라. 너라도 기운 차려야 한다.” 그는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수염은 한 뼘이나 자라있었고 광대뼈는 쇠무릎 같은 몰골로 고기를 마분지 씹듯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고기 먹는 양(量)을 알아도 너무나 잘 안다. 그는 한 자리서 돼지갈비 5~6인분 정도는 간식 취급하는 마귀였다. 한 번은 내기당구에서 진 내가 그와 고깃집에 갔다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입을 상식으로 접근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는 주먹 크기도 보통 남성의 두 배나 되는데, 그의 “선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이가 없다는 무용담이 그가 사는 도시에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는 놀랍게도 턱관절을 분리해 그 큰 주먹이 다 들어가는 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마치 자기 머리통의 몇 곱절이나 되는 알을 꾸역꾸역 입안에 집어넣는 뱀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 그가 상추 대여섯 장을 그 큰 손바닥에 포개놓고 고기를 수북이 올려 아귀 같은 입 속으로 집어넣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내 돈 나가는 처지에서 어찌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날 나도 밑지지 않으려고 실성한 듯 먹어 댄 결과, 계산서에는

한국 첫 포크록 그룹 ‘따로 또 같이’ 노래

가장 문학적인 제목 <해는 기울어 어느 가슴으로 가나>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6]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느새 가을이 다녀간다. 배추 밑동이 도려지고 무가 뽑히고 집집마다 담벼락에 장작더미가 쌓여간다. 개옻나무 밑엔 붉은 양탄자가 깔리고 찔레 덤불 참새소리가 한층 야물어졌다. “빛은 휘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설이 아니다. 갈대 이삭이 일으키는 바람에도 서녘 햇살은 휘어지고 늘어져서 금실그물을 호면 위에 풀어 놓는다. 꽃은 땅에서만 피지 않는다. 처마마다 곶감으로 꿰어져 겨울로 가는 이정표로 피어있다. 내가 어살*에 걸린 물고기처럼 세파에 떼밀리는 동안 이렇게 가을이 다녀가고 있다. 그동안 참 바쁘게 살았다. 집을 짓는 일, 연못과 도랑을 파서 정원을 만들고 꽃밭 가꾸는 일만 해도 허리가 휘어질 지경인데, 비록 녹음방송이라곤 하지만 매일 나가는 프로그램을 턱 하니 맡았으니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평생 해온 일이 방송이라 앞뒤 재지 않고 덥석 달려든 게 나를 조급증으로 몰고 가고 말았다. '바쁘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뜻 말고도 '어렵다'라는 뜻을 지닌 함경도 사투리가 그것이다. 바쁘게 살면 다른 건 몰라도 살림살이의 어려움은 줄어들어야 할 텐데 더 하면 더 했지, 여간해서 나아지지

‘사랑 발라드’ 모던포크의 대명사 되다

톰 팩스턴(Tom Paxton) <마지막 남은 것>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5]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들판이 비어간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듬성듬성 누런 늦벼가 성성하더니 이제 밭에 푸른색이라곤 무, 배추밖엔 남지 않았다. 풍요가 황량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음에 마음이 소소해져, 마당에 나와 서리 맞은 꽃씨를 받으며 새삼 “남는 것”과 “남기는 것”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꽃이 꽃씨를 남기듯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열매를 남긴다.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다양한 열매를 맺는데, 훌륭한 학업으로 후학들에게 맑은 산소 같은 열매를 남기는 사람, 불길 같은 예술혼으로 영롱한 열매를 남기는 사람, 성품이 온화하고 사랑이 깊어 향이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 열매는 식물의 열매든 사람의 열매든 지나온 날들이 새겨져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면 인생의 가을도 깊은 것인가? 초겨울로 접어드는 초로의 길목에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나’라는 잡초는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남기고 스러질까? 막상 생각해보니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소장음반을 내세우자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내용도 더 알찬 이가 여럿일 테고, 음악활동 역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가 많고 많을 것이다. 글 실력 또한 남

가정의 달에 띄우는 사랑노래

바블 껌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4]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사월은 분홍 세상이었다. 얼음새꽃, 고들빼기꽃, 구릉대꽃이 깔아놓은 노란 멍석 위에 진달래, 산벚꽃, 개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져 노을마저 분홍으로 물들였었다. 그 분홍 사월이 가니 이젠 층층나무, 이팝나무, 때죽나무, 찔레꽃 같은 흰 꽃들이 오월을 뒤덮는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덕택에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꿀맛 같은 망중한(忙中閑)이다. 취나물, 동박 잎에 부추겉절이를 얹어 싼 삼겹살에다 아내가 빚은 청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이 맛이 그 맛이요, 이 세상이 바로 내 세상이다. 우리는 길게 다리를 뻗고 내친김에 영화도 한 편 감상했다. 옛날 영화를 쭉 검색하다가 빨간 냄새가 나는 제목이 있어 눌러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1972년에 제작된 <꽃 파는 처녀>라는 북한영화였다. 구닥다리 “꼰대”라서 북한영화가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한동안 지남력* 상실상태로 있다가 정신을 차려 격세지감(隔世之感)으로 보았다. 1930년대가 시대배경인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어느 고장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리 크지 않은 저잣거리에서 “꽃분이”라는 한 처녀가 꽃을 팔러 다니는 장면에서

제비는 돌아왔건만 온다던 님은 소식도 없고

윤승희 <제비처럼>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3]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분홍 아지랑이로 버디기재 마루가 가물거리고 강 건너 큰골 장끼소리 빨랫줄 타고 내 귀에 꽂히면.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마른버짐 얼굴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기계충* 꽃 까까머리에 빨갛게 피어나면. “할머이, 제비는 운제 와?” 이제 제비만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나의 이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아 하늘님이 제비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라고 시킬 것 같았다. 그러면 뜬구름으로 떠도는 아부지도, 돈 벌러 서울로 간 어머이도 돌아와 온 식구가 오순도순 한 군데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똥 앉은 꽁보리밥은 더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2) 제비가 와야 한다. 홍매화 지는 창가에서 내다보니 아직은 메추라기와 직박구리 같은 겨울새나 텃새들만 보이지만 밭가에 냉이꽃 피고 개구리 소리 들려오니 제비도 곧 오겠지. 그래야 제대로 갖춰진 봄이라 할 수 있겠지. 과연 우리 집 처마 밑에 집을 지을까? 우리가 거들어 줄 방법은 없을까? 쑥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며 눈이 동그래진 아내에게 숟가락을 손에 들고 아침부터 제비 얘기만 해댔다. (3) 그래,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은하수를 건넜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