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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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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 역할로 화제를 모았던 노래

앨버트 하몬드 <남가주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5]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또다시 가뭄 걱정이다. 개울이 마르고 마당가 도랑물도 말라간다. 물이 마르니 땅이 마르고, 땅이 마르니 작물도 마르고 작물이 마르니 마음마저 말라간다. 그나마 며칠 전 내린 단비 덕분에 작물들이 푸르름을 되찾는 듯했으나 그것도 이삼일 뿐, 다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다. 요즘은 날씨 검색으로 하루를 열고, 잠들 때도 한 번 더 확인한 뒤 하루를 닫는다. 우리 고장은 해마다 이맘때면 가뭄 때문에 속을 썩였던 것 같다. 보이저 우주선이 태양권계면*을 벗어나 성간우주로 나가고, 제임스 웹 망원경이 백몇십억 광년 떨어진 곳의 별들도 들여다보는 세상에 아직도 하늘을 바라보며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게 좀 의아하기도 하다. 문득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미래에는 1. 꿈을 찍는 영화 2. 냄새가 전달되는 사진과 영화 3. 서로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전화기 4. 필요에 따라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는 기술 이 개발될 것이라는 말씀 말이다. 이 네 가지 신기술 가운데 1과 2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지, 않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감감무소식이고, 3은 실용화하여 우리가 혜택을 아주 잘 누리고 있는 분야다. 나머지

한국전쟁이 남긴 애련의 노래 황정자 <처녀 뱃사공

돌아오지 않는 참전용사 오라버니를 기다리는 처녀 뱃사공의 사연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4]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삐띠기”라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사 올 때부터 벌써 그렇게 부르더랍니다. 커서 생각해 보니 우리 마을은 참 이사도 많이 오고 많이 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대를 진득하니 눌러사는 집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나루터가 있어 오기도 쉽고 가기도 쉬워 그런지, 언덕배기 강마을이라 논이 없어 그런지 우리 집안을 비롯해 서너 집안만이 4~5대 이어 살 뿐이었습니다. 삐띠기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것 같습니다. “배텃거리”와 “웃배기미” 다해서 스무나믄 집 정도 되는 곳이라 또래가 드물어 서너 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었지요. 삐띠기는 나의 두 번째 색시였습니다. 첫 번째 색시인 언년이도 나보다 세 살 많았지요. 차분하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프다는 얘기가 들리고 몇 달 뒤 언년이 엄마가 딸을 가슴에 묻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삐띠기는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동갑내기 금복이와 장표가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을에 어린애라곤 우리 둘밖엔 안 남았지요. 나이에 비해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삐띠기에겐 소꿉장난은 이미 시시한 놀이였는지도 모

봄을 대표하는 노래 최숙자 <개나리 처녀>

기지촌에서 만났던 “개나리 처녀”라는 별명의 여인, 개나리꽃 필 때면 생각나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3]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때 동방규라는 시인이 살았다지요. 그는 전한(前漢)의 효원황제(孝元皇帝)때 왕소군(王昭君)이라는 궁녀가 흉노족의 우두머리 호한야에게 공물에 끼워져 시집간 것이 못내 아쉬워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를 지었다네요. 왕소군은 하늘의 기러기도 그 미모에 넋이 나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질 정도였대요. 그래서 낙안(落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전해 오지요. 동방규는 그게 어지간히도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칠백 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소군원>이란 시가 천삼백여 년이나 흐른 이십 세기말에 때아니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지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그랬었지요. <소군원>의 한 구절처럼 1980년 신군부 시절, 이 땅의 봄은 그랬답니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로다! 그 봄의 어느 날 나는 경원선 열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이라는 명사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봄이었지요. 그렇게 봄 같지 않은 봄도 처음이었고, 경원선 열차도, 동두천이라는 도시도 처음이었답니다. 망월사역을 지나고 의정부를 지날 때까지는 서울처럼 개나

메마른 세상을 촉촉이 적셔주는 사랑의 배달부

마블리츠 <잠깐만요, 우체부 아저씨!(Please Mr. post man)>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2]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배달부에 불과하다 한다. 학문 여러 분야를 깊이 연구한 그가 생명의 기원을 “우주 도래설”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가장 전투적인 무신론자”라는 평을 듣는 그는 생명체의 탄생이 지구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졌거나 창조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견해와 신념은 찰스 다윈이 《종(種)의 기원》을 펴냈을 때보다 격렬한 비난과 저항을 견뎌야 했다. 창조론적 신앙의 시작은 인류에게 자의식이 생길 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몇 만 년 동안 그렇게 믿어 온 그 신념은 굳을 대로 굳어 그 어떤 모순도 덮어버릴 만큼 공고(鞏固)해졌고 또한 세상 사람들 절대다수가 그렇게 믿고 산다. 아직은 세상의 흐름이 이러할 진데 그는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도 모자라 무신론의 확산까지 외치고 나섰다. 사실 무신론이 이론적 체계를 갖추고 조목조목 창조론에 맞설 수 있게 된 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라는 구도자를 내세워 기존의 창조주와

인기가수의 숨겨진 노래들

영화 “갈매기 우는 항구”의 주제가 음반에 담겨진 노래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1]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보리밥이나 잡곡밥은 먹지 않고 쌀밥만 먹었으니 그렇지.” “지적질” 전문가인 아내가 탁배기잔을 내려놓으며 일갈(一喝)했다. 우리는 종종 아내가 빚은 탁주 한 잔과 음악으로 산골살이의 고단함을 달래곤 하는데, 음악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목록(레퍼토리)이 뻔하다. 추리고 추리기 때문이다. “판이 천장이나 만장이나 들을 게 없기는 매한가지”라 투덜대니까 아내가 놓칠새라 비수를 꽂은 것이다. 씹던 안주가 목에 걸리는 듯했다. 가슴에서 덜컥 소리가 나고 머리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나? 내가 그렇게 되었나? 혈당을 낮춘답시고 현미밥을 주식으로 삼고 매식을 할 때도 보리밥집을 찾아 뒤지면서도 정작 음악은 “쌀밥”만 골라 들었구나. “이눔아야! 전깃세 생각도 쫌 하그라.” 음악실에는 이미 빈 소줏병 몇이 나뒹굴고 있었고 시각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음악 없이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대폿집에서 마시는 날에도 마지막은 늘 음악실에서 술자리를 마쳤다. 어느 업소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그건 불문율이었다. 그러니 가는데 마다 주인들 인상

피어나지 못한 꽃, 어둠 속에 묻힌 별

손석우 작곡가가 손짓한 태민호, <내 이름은 방랑자>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0]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 가녀린 허리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희뿌연 하늘에 눌려서도 아닌 것 같고, 둘러매고 있는 전기기타의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비실비실한 체질이란 게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네 마음 안다. 고맙다. 그저 바람 따라 떠다니다 때 되면 갈란다.“ 금방이라도 양회가루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낮은 구름에 온갖 매연까지 뒤섞인 바람이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실루엣은 대기에 스며들고 말았다. 태민호! 어쩌면 그에게는 태민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러니까 장효민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집은 비록 서울의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문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번듯한 양옥은 아니지만 여섯 식구 궁둥이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다 문간채의 방 두 개는 세를 놓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다. 대학도 그가 음악에 빠져 안 간다고 버텨 그렇지, 돈이 없어 못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60년대의 가정치곤 중류 이상은 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서울의 명암을 간직하고 흐른 '청계천'

60년대를 풍미한 가수 ‘남일해’ <청계천의 밤>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9]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최진희 <천상 재회>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8]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새벽잠에서 깨어난 현영감의 마음은 지푸라기 헝클어뜨린 것 같았다. 단 한 번 본 사람이 그렇게 또렷하게 꿈에 나온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만증에다 하지정맥류로 고생하는 할멈을 부축해 오줌을 뉘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 껍질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기만 했다. 창에는 성에가 고사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다시 볼 일이야 없겠지만 전화번호라도 받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멈 몰래 빠져나와 거실을 서성이며 조반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 청소이시더. 박 씨 양반 댁이니껴?” “아,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 당부도 있고 해서 삼우가 지나면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박 씨. 야위어 보여도 단단한 구석이 느껴지던 사람.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러쓰는 작은 손이 맵차 보이던 사람. 얄궂은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매제가 될 뻔했던, 눈꼬리가 유난히 부드러운 사람. 그가 현영감을 찾은 건 두어 달 전 가을 거두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 여기가 월외리가 맞습니까? 아까부터 낯선 이가 집집이 다니며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현영감네 차례까지 온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