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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미국 민요의 아버지가 오선지에 그린 인류애

스티븐 포스터 <고난의 날들이 다시 오지 않기를>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7]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원주역의 겨울밤은 유난히 차가웠다.

한 편에서 조개탄난로가 타고 있었지만 텅 빈 대합실을 데우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난로를 껴 안 듯 오골오골 몰려 들었다. 막차가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 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동수는 느닷없이 코끝이 찡해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천장엔 거미줄이 잔뜩 쳐진 선풍기만 매달려 있을 뿐 고향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너른 마당으로 나오니 황소바람이 기어코 난로에 누른 돕바* 틈을 헤집고 들어왔다. 눈에는 다른 때보다 밝게 빛나는 남쪽 하늘의 별빛이 들어왔고 귀에는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 소리가 들어왔다.

(저 기차를 타면 고향으로 갈 수 있다.)

할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냥 확 가버릴까?

아니지 내가 가버리면 몸져누운 엄마는 어쩌나. 이 막차에서도 공을 치면 열 입이 끼니를 걸러야 한다.)

구렁이 기어 오듯 천천히 플랫폼에 들어온 밤 열차는 알 까듯 승객 몇을 옆구리에서 슬어놓았다.

 

“아저씨 주무시고 가세요. 네?”

“예쁜 누나 있어요. 주무시고 가세요.”

동수는 남자 손님이 나올 때마다 쫓아가 옷소매를 붙들고 호객을 했다.

더럽다는 듯 손을 뿌리치는 사람, 아예 들은 척도 안 하는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인적이 끊겼다. 눈앞이 캄캄해 왔다. 꾀부리고 놀았거나 난로 옆에서 잠을 잤을 거라며 의붓아버지가 또 때릴 것이다. 누가 안아주면 그 품에서 엉엉 울고 싶었다.

 

“얘, 꼬마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다보니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모자를 삐딱하게 쓴 군인 아저씨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마니?”

열차 안에서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온몸에서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아, 네. 긴 밤은 육백 원이고 짧은 밤은 삼백 원이에요. 방값은 백 원이고요.”

행여 군인 아저씨의 마음이 바뀔까 하여 동수는 뛰듯이 걸어 “희망촌” 어느 판잣집에 들어서서 주인을 불렀다.

 

날이 밝자마자 동수는 쌀가게로 달려가 지난밤에 번 팔십 원으로 납작보리쌀 한 되, 좁쌀 한 되 그리고 수수쌀도 몇 홉 샀다. 그거면 열 식구 하루 풀칠은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선 모두 그렇게 살았다. 몇몇 집을 빼고 나면 다들 됫박쌀이나 홉 쌀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부자라 봐야 시멘트 블록집이 고작이고 하다못해 벽돌집도 하나 없었다. 그것도 가겟집들만 그렇지 나머지 절반 이상이 판자 쪼가리에 루핑*을 두른 집들이었다. 심지어 유곽(遊廓)인 무허가 하숙도 판잣집이 수두룩했다. 방과 방 사이 벽은 골판지로 막았고 윗부분엔 구멍을 뚫어 전등 불빛을 두 방이 함께 나누었다. 열 살배기 동수는 그래도 그게 비참하다는 걸 몰랐다. 추위에 떨고 고달파도 그렇게도 그리던 엄마와 함께 살 수 있어 좋았다.

 

동수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의 어느 자그마한 강가 마을이었다.

의원(醫員)인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땐 그 일대에선 제일가는 부자였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가 폐병(肺病)으로 동수 아버지 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 그건 곧 기질이 강한 동수아버지를 통제하거나 타이를 어른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수할머니도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지만 동수아버지한테는 상대가 못 되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자란 동수아버지는 기골까지 장대하여 이미 열네 살 나이에 소를 팔아 서울에 가서 기생집에 눌러앉아 탕진하고 올 만큼 개망나니였다.

 

동수아버지가 그렇게 가산에 손을 대기 시작하자 “군(郡)내에서는 남의 땅 안 밟는다.”라던 재산이 눈에 띌 만큼 줄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망국병”이라던 아편까지 탐닉하자 남은 재산은 주먹 안의 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편에 눈이 뒤집힌 동수아버지는 약값을 대려고 시세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값에 전답을 팔아치우곤 했다.

 

그래도 동수가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사방 백리 안에서 제일 큰 집이라던 기와집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집도 동수가 첫돌이 되기도 전에 남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장가를 들면 혹시 정신 차릴까? 하여 동수할머니가 이웃집에 다니러 온 그 집 친척처녀를 구슬려 며느리로 맞았지만, 동수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 오랜 사람이었다. 그제야 동수할머니는 작은아들이라도 거지 신세 면하게 해주려고 땅 몇 뙈기를 떼어 줬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땅 판 돈으로 천지사방 돌아다니다 돈 떨어지면 돌아와서 집안의 곡식이건 물건이건 돈 되는 것은 몽땅 팔아치우는 사람이 동생 땅인들 무서워했겠는가? 동생도 기를 쓰고 대들어 봤지만, 눈에 핏발이 서서 날이 시퍼런 칼을 목에 들이대는 데야 당할 재간이 없었다.

 

동수에게는 동생이 둘 있었다고 한다.

세 살 터울 여동생은 엄마 등에 업혀 있다가 아버지가 엄마를 두들겨 팰 때 놀라 경기(驚氣)로 죽었고, 다섯 살 아래 남동생도 엄마 등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떴다.

 

돈이 떨어지자, 집으로 돌아온 동수아버지가 보리쌀 항아리를 탈탈 털어 둘러매고 나서자, 필사적으로 말리던 엄마를 지게작대기 건 장작개비 건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후려쳤다. 광기가 하늘을 찌른 동수아버지는 그것도 모자라 쓰러져 정신을 잃은 동수 엄마를 마구 짓밟았다. 동수 동생 동호도 그때 구둣발에 이마를 채였다. 몇 시간 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자를 발견한 동수할머니는 사람들을 불러 둘을 방으로 옮겨 뉘였다. 동호는 그래도 이내 정신을 차려 엄마 젖을 물었으나 동수엄마는 혼절상태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동수아버지에게 맞아서 정신을 잃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보름 만에 정신이 돌아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레 만에 미음이라도 떠 넣게 된 엄마는 초인적인 의지로 다시 자리를 털었으나 동호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명줄을 놓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구둣발에 까인 상처의 딱지가 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동수는 그런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자랐고 그것이 뒷날 엄마가 아무리 미워도 절연할 수 없는 원인이 된다.

 

“문 걸어 잠궈!”

의붓아버지가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는 차마 그 꼴을 못 보겠는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젠 말려줄 사람도 없었다. 의붓아버지는 동수를 방구석으로 몰았다. 그리고 그 큰 주먹으로 아구통을 힘껏 갈겼다. 들큰한 비린내가 입안에 퍼졌다.

 

“울어? 울어? 눈물 흘리지마. 찍 소리도 내지마.”

그리곤 반대쪽을 또 후려쳤다.

 

가락국수가 발단이었다. 동수는 원주에 온 지 한해를 넘겼지만, 아직 못 먹어 본 게 많았다. “양과자”라는 간판이 걸린 가게의 진열장에 있는 빵이나, 달걀처럼 동그랗게 생긴 것도 궁금했지만 그런 것들은 날이 저물면 문을 닫으니까 덜한데, 밤에 포장마차에서 파는 가락국수는 정말 먹고 싶었다. 특히 막차 손님을 보고 한 밤에 빈속으로 와들와들 떨면서 그 앞을 지나갈 때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락국수는 평생소원으로 다가왔다.

 

동수는 천성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무얼 감추거나 하는 성격이 못되었다.

돈을 많이 벌면 버는 대로 신이 나서 다 갖다 바치면 바쳤지 “삥땅”을 치거나 하질 못했다.

어쩌면 그런 꾀를 내기에는 너무 어렸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낮에 가지고 나간 군밤을 다 팔았고 밤 벌이도 좋았다. 막차 손님은 멋진 코트를 입고 있었고 마음씨도 아주 좋아 보였다. 동수는 그 손님을 하숙에 모셔다드리고 머뭇머뭇 입을 떼었다. “저, 아저씨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아직 가락국수를 한 번도 못 먹어 봤어요. 저한테 십 원만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번 돈은 아버지에게 모두 갖다드려야 해서 손을 댈 수가 없어서요.”

 

 

그 손님은 흔쾌히 십 원을 주었다. 동수는 날 듯이 포장마차로 달려가 평생소원을 풀었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곤히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가 발길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요 쥐새끼 같은 놈 당장 일어나지 못해!”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의붓아버지였다. 아직 잠이 덜 깬 동수는 멱살까지 잡혀 더욱 정신이 없었다. 다짜고짜로 지난밤의 일들을 다 불라는 것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동수가 더듬더듬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자 의붓아버지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조막만한 얼굴을 힘껏 갈겨댄 것이었다.

 

동수는 사건의 내막을 나중에 엄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선뜻 십 원을 내주어 동수의 평생소원을 풀게 해준 그 신사는 겉으로는 내색을 안 했지만 퍽이나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하숙 주인에게 말해 버렸고, 그 주인이 날이 새자마자 찾아와 동수 의붓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동수는 입안이 사방 찢어져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씹지 못했다.

 

“어머이 내가 한 가지 물어볼 기 있는데”

보리타작하듯 그렇게 얻어맞은 날 오후 동수는 엄마와 빨랫감을 이고지고 냇가를 찾았다.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생활하수 때문에 물 색깔이 시커맸으나 공동수도에서 물지게로 물을 사다 먹는 형편에 집에서는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탓에 물은 차가웠지만 날이 포근해 그럭저럭 견딜만은 했다. 다만 영양실조와 신경쇠약으로 쓰러져 열흘 넘게 누워있던 동수엄마에겐 빨래가 버거웠을 것이다.

 

모자는 빨래를 마치고 마른 풀밭에 잠깐 엉덩이를 붙였다.

“어머이 그때 제천서 왜 날 버리고 갔어?”

전혀 예상치 못한 동수의 물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참을 말이 없던 동수 엄마는 각오한 듯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둘은 잠시 이태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편에 눈이 뒤집힌 동수아버지가 논밭이건 집이건 하다못해 놋숟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팔아버리자, 살길이 막막해진 남은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집에 같이 살던 작은아버지네는 오두막을 하나 얻어 나갔고, 고모들은 서둘러 시집을 갔다. 그리고 할머니는 제천에 있는 친척집에 식모살이를 떠났고, 엄마는 친정 일가들이 모여 사는 영월 탄광촌으로 동수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 사방을 떠돌며 행상을 했으나,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데다 꾀도 모자라 손익계산을 할 줄 모르는 동수엄마는 맨날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만 했다. 생각다 못한 동수엄마는 동수할머니가 있는 제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하였다.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는 처지인지라 입 하나 딸렸다는 이유로 월급도 없이 역 부근 어느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얼굴도 잘생기고 뿔테안경까지 걸친, 행색이 어디를 보아도 부잣집 아들처럼 생긴 손님 하나가 들락거렸다. 그런 얼마 뒤 동수가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네 에미가 새벽에 그놈하고 도망쳤으니 너는 할머니에게 가라.”라고 쏘아붙였다. 동수는 할머니가 식모살이하는 여인숙집에 얹혀 잔심부름으로 연명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숙의 단골손님이 원주역에서 행상을 하는 동수엄마를 봤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동수가 엄마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 니를 버린 기 아이고, 지금 아부지가 돈 마이 버는 직장에 취직 시켜준다고 해서 따라나섰지. 니한테 얘기하믄 따라온다고 할까봐 그랬지. 니는 똑똑하니까 할머이한테 갈 거로 믿었지.“

 

동수의 눈에선 눈물이 고드름 녹듯 흘러내렸다. 짠물이 터진 입술에 닿으니 쓰라려 왔다. 억울했다. 엄마를 속여서 데리고 온 것도 분한데, 왜 엄마와 내가 죽도록 고생해서 손끝도 까딱 안 하는 그 집 식구를 여덟이나 먹여 살려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짐승만도 못하게 얻어맞고 사는 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수에게 현실의 눈이 생긴 것이다. 엄마도 미웠다. 진작 엄마를 미워하지 못한 자신도 미웠다. 동수는 그날 밤 입은 채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곳이었다. 원주역에서 가끔 본 얼굴도 있고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넝마주이도 있고, 극장 앞에서 구두 닦는 형들도 보였다.

 

동수는 집에서 나와 오촌 아재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 아재는 국민학교를 나오자마자 친구들과 무작정 상경을 하다가 여비가 떨어져서 원주역을 배회하다가 구두닦이가 되었다 한다. 동수보다 다섯 살 위였다고는 하나 그 역시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소년인지라 동수의 밥벌이를 알선해 줄 처지가 못 되었다.

 

“너 나하고 양동에 갈래?”

아재가 있는 곳의 두목은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양아치”라 불리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그 세상이나 이 세상이나 사는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정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곳이 더 진할지도 모른다. 동수는 그곳에서 두목아저씨의 배려로 일주일 공밥을 얻어먹으며 지냈다. “양동에는 딱새가 없어, 손님이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돈 많이 안 벌어 와도 돼. 우리집이 역 앞에서 식당 하니까 밥은 안 굶어.”

동수는 그 제안을 한 청년을 따라나섰다.

 

아담한 시골 역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차가 오갔지만 정작 내리는 손님은 몇 안 되었다. 동수는 그곳에서 자신을 데리고 온 청년에게 배워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아재가 형이라 부르는 걸 보니 스무 살 가까운 것 같았다.

동수도 형이라 불렀다. 그 형은 하루 종일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때가 되면 나타나 돈만 챙겼다. 그래봤자 몇 푼 안 되는 돈이었다. 잘해야 하루에 두세 켤레고 공치는 날도 가끔 있었다. 한가해지니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던 고향이 그리워졌다. 미워서 나오긴 했지만, 고생 굴에 홀로 남겨진 엄마도 걱정이 되었다.

 

“네가 이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2학년 때 담임선생님 말씀이 머리를 때렸다.

말이 2학년이지 1, 2학년 다 합해봐야 고작 학교에 나간 날 수는 서너 달도 안 될 것이다. 그 여선생님은 늘 동수의 그런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 저녁때면 동수를 자기 집으로 불러 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그래, 평생 남의 구두만 닦을 순 없다. 학교엘 가야 한다. 할머니를 졸라 고향으로 가자. 작은아버지도 가난하지만, 워낙 착한 분이니 우릴 받아 줄 거다.) 동수는 그길로 기차에 올랐다. 동수에게 자아가 생겨난 순간이었다. 동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빌고 또 빌었다. 이 고난의 날들이 다시 오지 않기를.

 

Hard times come again no more

 

삶의 즐김을 잠시 멈추고

(가난한 이들이) 흘린 수많은 눈물들을 헤아려 보세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슬픔을 나눌 때

우리 귀에 영원히 맴돌 노래가 있으니

오, 힘든 날들이여 다 오지 않기를

 

지친 이들의 한숨인 그 노래

고통의 시간들, 고난의 날들이 다시 오지 않기를

오랫동안 그대는 내 오두막집 문가를 맴돌았지

우리가 기쁨과 아름다움, 밝고 흥겨운 음악을 찾을 때

문 앞에는 수많은 힘없는 이들이 쓰러졌지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애원의 눈빛은 이렇게 말했지

오, 힘든 날들이여 다시 오지 않기를

 

19세기 중반 미국은 동부와 서부 간의 빈부 차이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 노래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서부의 주민들과 노예들을 위해 지어졌다. 또한 남북전쟁으로 지친 미국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고, 20세기 초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 속에서 미국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 노래를 지은 스티븐 포스터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작곡가다. 특히 전후 세대들은 “홍난파는 몰라도 스티븐 포스터는 안다.”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음악시간에 그의 작품들을 참 많이도 불렀다.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1826년 7월 4일에 태어났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였다. 부호 집안의 10남매 가운데 막내여서 부러울 게 없이 자랐으나 30대 후반에 이미 파산지경에 이르러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그가 세상을 뜰 당시에도 그의 악보는 인기리에 판매되어 적지 않은 수입이 있었으나 그는 늘 가난에 시달렸다. 그 까닭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미국 민요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뛰어난 작품들을 수없이 많이 남겼으나 ‘천재박명’의 속설을 깨지 못하고 1864년 1월 13일 싸구려 호텔에서 홀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불혹’이라는 나이 사십도 못 채운 채.

 

‘Hard times come again no more(고난의 날들이 다시 오지 않기를)’는 아마 악보에 들어간 음표보다도 많은 가수가 불렀을 것이다. 그 가운데 메조소프라노 얀 데 가에타니(Jan De Gaetani)가 부른 노래를 권한다. 풍금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로 고졸(古拙)한 맛이 일품이다.

 

*돕바 - 일본어 ‘トッパ’에서 온 말.

*루핑 – 방수 종이. 종이 양면에 아스팔트를 바르고 겉에는 돌가루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