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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봄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장미화 <봄이 오면>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49]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낙골의 하루는 다른 데보다 두어 시간 이르게 열렸다가 서너 시간 늦게 닫힌다. 막노동판을 나가든 남대문 시장에 지게꾼으로 나가든 새벽 다섯 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일터가 가까운 이들도 서둘러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출근 시간에 버스를 얻어 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1.4후퇴 때 흥남부두 LST 오르기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을 것이다. ‘공중도덕’이니 ‘시민의식’이니 하는 게 아직 몸에 배지 않은 시절이라 기본적인 줄서기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버스가 오면 사람들이 지남철에 쇳가루 달라붙듯 몰려들었다. 종점이라 차를 돌리기 위해선 회전반경이 필요한데 그런 것은 아랑곳없었다. 사람을 치지 않으려면 할 수 없이 차를 세워야 했고, 차장이 문을 열면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문 앞에까지 뚫고 가는 게 문제였지 그다음은 진공청소기에 쓰레기 빨려들 듯 들어간다. 뒤에서 밀어붙이기 때문에 되돌아 내릴 수도 없다. 옷이 뜯어진다거나 머리핀을 잃어버리는 건 다반사고,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는 사람에다 몸은 밀려들어 갔으나 책가방을 놓쳐 발을 동동 구르는 학생까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종점에서부터 이 지경이니 종점과 가까운 데 사는 사람들은 탈 수가 없었다. 내리는 사람이 있어야 타는데 몇 정거장 만에 내릴 사람은 거의 없으니 무정차 통과가 일쑤였다. 그러니 그 사람들은 버스 삯을 한 번 더 물더라도 차라리 올라오는 버스를 타는 고육지계를 냈다. 그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편히 앉아갈 수 있는 덤도 얻을 수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우격다짐에 약한 사람은 버스 몇 대를 놓치고서야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상수 역시 그렇게 억척스러운 편이 못되기에 아예 그 시간대를 피해 새벽 네 시 반에 떠나는 첫차를 타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시각이라 타고 내리는 시간도 얼마 안 걸리고 이것저것 따져보면 학교까지 두 시간은 잡아야 하던 게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마침, 수위아저씨가 홀몸이라 숙직실에 자기 때문에 일찍 교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고 이눔아! 못 간다. 이 애밀 두고 어딜 간다냐.”

“어허, 조용히 좀 해야. 소문나면 안 된당게.”

 

동지 지난 지 달포나 되었는데도 낙골 비탈의 새벽은 뒷산에 가려져 여명조차 비추질 않았다.

“아차! 용택이.”

그날도 첫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선 상수는 용택이 어머니, 아버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머뭇거린 끝에 등교시간을 늦추기로 하고 상수네 보다 축대 한 단 위에 있는 용택이네 집으로 올라갔다. 희미한 전등은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동네 아저씨들 두 서넛을 비추고 있었고, 방 안에선 소복차림의 앳된 소녀가 바가지 물을 용택이 어머니 입에 물리며 주무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용택이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 색시인 것 같았다.

 

용택이.

상수보다 두 살 아래였으니 이제 갓 열일곱 살이었다.

고향은 전라도 어느 섬이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섬이라 외우기도 쉽지 않았다. 60년대에 호남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서울로 왔다고 했다. 용택이네 형편은 그야말로 빈중빈(貧中貧), 곧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도 유난히 가난했다.

 

농사일밖엔 배운 게 없는 용택이 아버지는 막노동을 나가도 잡부밖엔 할 게 없었다. 기술이 없으니, 일감도 적었고 품삯도 쌌다. 일이 있다고 한들 고향에서 이미 골병이 들 대로 들어 공수(工數)*를 채우지 못할 때가 많았다. 며칠 나가 간조를 타봐야 일 없을 때 먹고 산 빚 갚고 나면 또다시 빈손이니 용택이 엄마까지 나가 벌어도 좀처럼 살림이 나아지질 않았다. 거기에다 솔방울 같은 자식들은 주렁주렁 다섯이나 열렸으니 맏이 용택이는 부모들 일 나간 사이 동생들 돌보느라 학교에 가질 못했다. 아마 국민학교를 사오 학년 다니다 말았을 것이다.

 

한 번은 몸져누운 용택이 아버지가 안쓰러워 누가 동태 두어 마리를 나누어 준 모양이다. 그런데 쌀이 없어 동태국만 끓여 먹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일본에 사는 용택이 어머니의 삼촌이 해방 맞은 뒤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으나 부모님과 형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남은 피붙이라곤 조카 딸밖엔 없어 물어물어 찾아왔으나 사는 모습을 보니 하도 기가 막혀 눈물만 흘리다 돌아갔다 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 삼촌은 자기 딴에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라고 식구마다 옷을 한 벌씩 사서 소포로 보냈는데 헛물만 켜고 말았다 한다. 관세를 따로 물어야 한다는 걸 어찌 알았겠는가.

 

낙골!

나중에 분구(分區)가 이루어지면서 관악구에 편입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영등포구 관할이었다. 그때는 한강다리 건너엔 영등포구와 성동구밖엔 없었다. 관악산 동쪽 자락을 경계로 반포에서부터 지금의 하남시 인근까지가 성동구고, 방배동부터 김포공항 근처까지가 영등포구였다. 그 시절 ‘강남’이란 대명사는 영등포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고, 지금의 강남지역은 ‘영동’이라 불렀다.

 

낙골은 60년대 중반까지는 집 한 채 없는 산등성이였다. 서울시는 그 산비탈을 깎아 종로구와 마포구, 용산구 일대의 철거민들은 하루아침에 그리로 내몰았다. 그들에게 지원된 건 땅 여덟 평과 천막 한 장이 전부였다. 처음 그들이 도착했을 땐 전깃불도, 수돗물도 없는 상태였다. 대중교통수단이래 봐야 시영버스 몇 대가 고작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전기도 들어오고, 버스노선도 확충되고 시장 건물도 들어섰다. 공동수도가 몇 군데 생기긴 했으나 수압이 약해 고지대인 그곳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여서 갈수기엔 물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한 바가지 물로 아버지가 맨 먼저 낯을 씻고 나면 그다음이 맏이 그다음 둘째 이런 순서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출근하고 학교에 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일손이 좀 나는 집들은 우물을 팠으나 그것도 너도나도 따라 하니 물줄기 마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중학생만 돼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물지게를 지고 물을 찾아 나서야 했다. 십 리 산길을 걸어 뒷산 너머에 있는 약수사에 가서 길어오거나 저지대 마을에 가서 구걸해 와야 했다.

 

그런 곳이 낙골이었다.

행정동명은 신림3동이었으나 졸지에 생긴 동네라 법정동명은 달리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 비탈마을을 ‘낙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힘도, 돈도, 명예도 없는, 남은 것은 낙담밖에 없는 하바리*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형. 형은 공부 잘하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

나는 지곤이 형 밑으로 들어갈 거야.

거기서 힘을 길러 나중에 카바레 지배인도 하고 두목이 될 거야.“

어린 나이에 가위탁*에 들락거리는 용택이가 안타까워 타이르는 상수에게 용택이가 던진 반발성 대답이었다.

 

용택이가 열너댓 살쯤 되었을 때부터인 것 같다. 상수가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면 동네 아이들이 용택이네 집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자주 눈에 띄었다. 어떤 때는 여자아이들도 섞여 있었고, 용택이는 환기하느라 그러는지 쪽창과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곤 했다. 아마 어른들이 오기 전에 흔적을 지우려 그랬을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방안은 연기가 자욱했고 담배냄새가 진동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은 손버릇이 나쁘거나 걸핏하면 집을 나가 부모 속을 썩이고 싸움질을 일삼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머잖아 용택이 어머니가 밤늦게 용택이를 찾으러 다니는 일이 잦더니 급기야 용택이는 몇 달씩 소식이 없기도 하고, 소식이랍시고 와 봐야 경찰서나 가위탁*에서 오는 보호자 호출이 고작이었다.

 

“상수 너는 학교에 가야잖녀?

지금은 땅이 얼어 곡괭이질 안 해본 사람은 도움이 안 됭게 싸게 학교에 가더라고 이.“

 

용택이 주검은 어제 낮에 인수해 온 모양이었다. 사방 칼집이 숭숭 나서 맨정신으론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화장하려니 그럴 돈도 없어 통장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주검만 용달차에 싣고 왔다고 했다. 용택이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 몇은 의논 끝에 뒷산 넘어 으슥한 곳에 아무도 몰래 용택이를 묻기로 했다. 애장*이니 봉분도 필요 없었다.

 

“저, 아저씨 이러면 어떨까요? 누가 보면 곤란하잖아요. 아무리 새벽이라도 약수 뜨러 가는 사람도 있을 테니 제가 앞서가다가 누가 오면 ‘야~호’를 외칠 테니 아저씨들이 지게를 둘러싸거나 잠깐 비키면 되잖아요.“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용택이네 집이 거의 끝자락에 있어 몇 집만 지나면 산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송이 두 송이 드문드문 피던 꽃이 산마루에 다다를 즈음엔 집집마다 피어났다. 필라멘트 꽃*이 저 따스하고 포근한 꽃들이 가난의 핏줄들에겐 노고(勞苦)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니 상수는 콧등이 시큰해 왔다.

 

용택아, 발아래 저리 많은 꽃구름이 피었다.

꽃상여 타고 가거라.

그곳에 사는 동안 상수는 늘 봄을 간절히 기다렸다.

용택이네도, 규성이네도, 그곳의 모든 이들에게 하루빨리 추운 겨울이 지나가기를.

 

이제 그 달동네는 세상에 없다고 한다.

시장이 있던 부근까지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그 위쪽은 녹지지역과 운동시설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탈출을 꿈꾸며 살았던 곳.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를 빌며 살았던 곳.

 

               봄이 오면

 

     그 추웠던 겨울은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내님도 나를 찾겠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오면

     그님도 나를 찾겠지

 

     헬로아 헬로아 꽃들은

     헬로아 헬로아 어디에

     헬로아 헬로아 봄날은

     헬로아 헬로아 우리들에게

 

     그 추웠던 겨울은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내님도 나를 찾겠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오면

     그님도 나를 찾겠지

 

     헬로아 헬로아 꽃들은

     헬로아 헬로아 어디에

     헬로아 헬로아 봄날은

     헬로아 헬로아 우리들에게

 

     헬로아 헬로아 사랑은

     헬로아 헬로아 어디에

     헬로아 헬로아 그 님은

     헬로아 헬로아 내게로

 

7, 80년대 인기 절정의 율동가수 장미화는 1946년 서울에서 김순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칠 공주 가운데 막내였으나 언니들이 모두 6·25 때 숨지는 바람에 막내가 외동딸이 되는 아픔을 겪었다.

 

‘65년 여고생 신분으로 “KBS Top 싱어 선발대회”에 나가 입상한 것이 계기가 돼 곧바로 신중현에게 발탁된다. 같은 해 신중현이 조직했던 수많은 록 그룹 가운데 첫 밴드인 애드포(Add4)에 합류하여 두 곡을 첫 노래집에 남겼다. 애드포가 해체된 뒤에 미8군 무대에 진출하여 6년가량 미국과 동남아 순회공연을 다녔다. ‘73년 노래집<안녕하세요>로 입문하였으며 대표곡인 <안녕하세요>가 큰 인기를 끌었다. <봄이 오면>은 그 노래집에 같이 들어가 역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원곡은 네덜란드 출신의 혼성듀엣 마우스 앤 맥닐(Mouth&McNeal)이 부른 헬로아(Hello A)이며 ‘71년에 나와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한동안 대외활동이 뜸 하는 듯했으나 ’산마김치‘라는 기업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공수 – 실제 일한 날의 수

*하바리 - 지위가 맨 아래에 속하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가위탁 – 소년법에 따라 소년범을 분류 심사하는 기관

*애장 – 어린이 무덤

*필라멘트 꽃 – 백열등(필자가 만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