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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호화로운 부채, 조선시대 내내 문제였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29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오 때 진상하는 부채는 비단에 주칠(朱漆, 붉은 물감)을 하였는데, 사치스럽기만 하고 실용 가치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양대비전(兩大妃殿)에 바치는 것 외에는 다시 그렇게 하지 말라." 이는 《성종실록》 23년(1492) 3월 23일에 나오는 성종의 어명입니다. 얼마나 부채가 호화로웠으면 임금이 직접 나서서 주칠한 부채를 만들지 말라고 했을까요?

또 《정조실록》 정조 18년(1794) 11월 27일 기록을 보면 암행어사 서유문이 임금에게 고하기를 "흥양현(興陽縣 지금의 고흥)은 과거에는 대나무의 산지로서 해마다 부채 만드는 편죽(片竹)을 1천 5, 6백 자루나 혹은 2천여 자루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중간 줄임) 명색이 첩선(帖煽)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이가 한 자에 가깝고 그 살도 30개가 넘습니다. 대 하나를 베어 쓸 수 있는 것은 겨우 한두 마디뿐이니 만약 첩선을 만들려면 부채 한 자루에 큰 대 몇 개를 소비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인권 선생의 작품(전주부채연구소 제공)


 그래서 너도나도 호화로운 부채를 만든다면 대밭이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부채의 사치와 폐해는 이미 태종 때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예조에서 1ㆍ2품은 붉은 비단 원선, 3ㆍ4품은 남빛 모시 원선, 5품은 새털로 장식한 학령선, 그 이하는 장식 없는 쥘부채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태종은 그보다 더 간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종ㆍ정조 때도 문제가 된 것을 보면 임금의 뜻과는 달리 화려한 부채는 계속 인기 품목이었던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