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십이령 구빗길 기러기들 남녘으로 떠나던 동짓날 밤 행여 장닭이 깰까하여 숨 죽여 님 앞에 앉았습니다 님의 얼굴을 산호 빛으로 물들이던 이 화롯불이 사글면 이제 기약 없는 이별입니다 첫 닭이 울기도 전에 시어머니의 헛기침 소리 들려옵니다 차곡차곡 접어둔 얘기첩은 펴보지도 못 한 채 시어머니 죽으면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잿 속에 묻고 서둘러 싸리문을 나섰습니다 강물에선 얼음 째는 소리가 새벽하늘을 가르고 새파란 바람이 젖무덤을 찌릅니다 보따리 하나 품에 안고 바람보다 앞서 달렸습니다 해가 중천에 오르고 헤진 버선에 배롱 꽃이 피고서야 한 도부쟁이* 무리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언 밥 한 덩이 얻어먹은 연으로 맏 도부쟁이 아낙이 되어 그동안 시름 서른 단을 묶었습니다 어느 까치 떼가 유난히 시끄럽던 날 님을 닮은 청년 하나가 탕약을 달이는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청년과 도부쟁이가 감나무 잎이 수북하도록 얘기를 털어낸 이튼 날 아침 씨받이가 낳았다는 님의 아들을 따라 십이령 마루에 오르니 도부쟁이 영감 깊은 숨소리 예까지 들립니다 *보부상의 낮춤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