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10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새벽 2시에 카이세리역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다. 이제 여행도 3주가 되어가고 여행 가방을 끌고 가면서 갑자기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아마도 우리가 탄 기차는 아침에 앙카라에 도착하도록 시간표가 맞추어져 있나 보다. 카이세리는 중간역이기 때문에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고 조명도 어둡고 역 앞은 조용했다.
우리는 모처럼 택시를 타고 예약한 호텔로 갔다. 그 호텔은 지금까지의 숙소와는 달리 시설이 좋은 서구식 고층 호텔이었다. 병산에게 물어보니 1박에 미화로 28달러(우리 돈으로 3만원)라고 한다. 오전 11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8층 방으로 가서 각자 잠을 잤다.
나는 요즘에 잠을 적게 잔다. 원래는 잠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차츰 잠이 적어져 최근에는 하루에 4~5시간 정도 자면 충분하다. 아침 7시쯤 잠이 깨었다.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카이세리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카이세리는 터키 중부에 있으며 2017년 기준 인구 94만 명의 큰 도시다. 옛날 카파도키아 왕국의 수도일 때, 마자카(Mazaka)로 불렸다. 카이세리라는 이름은 로마 제국시대에 티베리우스 황제가 ‘황제의 거리’를 의미하는 카이사레아(Caesarea)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카이세리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울이 선교 활동한 지역이었는데, 한글 성서엔 카이사리아(공동번역)로 음역되어 있다.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성을 쌓게 하고 여러 번의 개수를 거친 성채가 아직도 시내에 남아 있다. 중부 소아시아의 상업 중심 도시로서 번창하였다.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와 자매결연을 한 도시다.
우리는 호텔에서 잠깐 잠만 자고 오전 11시에 여행 가방을 끌고 다시 나왔다. 병산이 구글 지도를 검색하더니 가까이에 좋은 식당이 있다고 말한다. 호텔이 카이세리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2km 정도를 우리는 가방을 끌고 식당까지 일렬로 걸어갔다. 다행히 우리가 찾아간 식당은 주인도 친절하고 식단도 우리 입맛에 맞았다. 고추와 마늘이 나오는 풍성한 식사를 아침 겸 점심으로 즐겁게 먹었다.
우리는 오후에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 지방에 있는 괴레메로 가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몇 시간 남아서 역사가 깊은 카이세리 도시를 관광하기로 했다. 처음에 들린 곳은 오래된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인데 들어가 보니 작은 마당에 나무와 화초가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러나 옛날에 교실이었을 공간이 이제는 모두 상점이 들어서 있는 관광지로 변해버렸다.
우리는 각자 취향대로 상점을 구경하였다. 나는 쇼핑보다는 식물에 관심이 더 많아서 마당에 있는 나무와 풀 종류를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종류들이 많았다. 어느 가게 앞을 지나는데 주인이 나와서 영어로 이야기를 건다. 모처럼 영어를 할 줄 아는 터키인을 만나 전단지를 주면서 설명을 했다. 가게 주인은 자기가 20년 전에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었다고 말하면서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다른 일행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나는 귈레귈레(터키어로 안녕)라고 말하면서 작별을 하고 일행과 합류를 했다. 그런데 친절한 그 터키인은 이웃 가게로 가서 시원한 음료수를 4개나 사서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 우리는 터키에 와서 친절한 터키 사람을 계속해서 만난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터키 여행기를 읽어보면 터키 사람이 친절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우리가 순례자의 복장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지금까지 겪어보니 단순히 친절이 아니고 친절보다 한 단계 위로서 환대를 받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잘 보전된 카이세리 성곽을 구경하였다. 성곽 안쪽으로는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시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시끌벅적한 시장 거리를 걸으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절로 난다.
길거리를 가다가 무늬를 그리는 장난감을 땅 위에 늘어놓고 파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갑자기 손주들 생각이 나서 20리라(우리 돈으로 4,000원)를 주고서 2개를 샀다. 병산에게도 사라고 권하니 그도 2개를 샀다. 거리와 시장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매우 깨끗한 전철을 타고 8개의 정거장을 이동하였다. 전철에서 내려 1km 정도를 걸어서 도시의 외곽에 있는 커다란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괴레메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 시간이 남아서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리면서 의자에 앉아 슬기전화로 이슬람 사원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이슬람 사원은 모스크 또는 자미라고 부른다. 모스크(mosque)라는 말은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뜻의 아랍어 마스지드(masjid)가 영어로 변형된 것이다. 모스크는 돔(dome) 형태의 지붕이 있다. 돔은 평화를 상징하며 돔의 끝은 초승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초승달은 ‘진리의 시작’을 뜻하는데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대표적 상징이다. 무함마드가 최초로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함께 떠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알라의 진리가 인간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사원 내부는 돔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없고 의자도 없고, 넓은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다. 모스크는 아라비아의 메카를 바라보고 있다. 가운데 넓은 공간에 남성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한다. 여성들의 자리는 양 측면이나 뒤편, 혹은 2층에 마련되어 있는데 커튼이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간혹 여성과 남성의 입장로가 다른 곳도 있다. 이슬람에서는 우상 숭배가 금지되어 있어서 사원 안팎에 인물이나 동물의 조각은 물론 동상이나 그림도 없다. 대신 코란의 구절이나 아라베스크 무늬(이슬람 문화권의 전통 무늬)로 벽면을 장식한다.
최초의 모스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집이었다. 무함마드의 집에 기도 시간마다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하고, 무함마드가 이들을 향해 설교하였다. 이슬람이 발생한 초기에는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카펫을 깔거나 성지의 방향을 나타내는 간단한 기둥을 세우는 정도에 그쳤을 뿐 지금과 같은 큰 규모의 모스크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고 각지를 정복하면서 접하게 된 피정복민의 웅장한 교회나 신전을 보게 되자, 정복자로서 이들을 압도하고 무슬림들을 한 곳에 모아 세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모스크를 짓기 시작했다. 광대한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지어진 모스크들은 동로마 제국의 건축양식을 답습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사원은 다음과 같은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1. 미나레
사원에 세워진 첨탑을 미나레라고 한다. 첨탑은 사원의 위치를 쉽게 알려주며 첨탑에 목소리가 큰 사람(무아진)이 올라가서 하루 다섯 차례 기도 시간을 알린다. 첨탑의 수가 많을수록 권력이 강한 사람이 세운 것이다. 예를 들면 이스탄불에 있는 블루 모스크는 첨탑이 6개가 있다. 그 당시 메카에 있는 사원의 미나레가 6개였는데, 메카에 있는 사원보다 미나레가 더 많으면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당시 술탄은 급히 메카에 사람을 보내어 미나레를 하나 더 짓게 했다고 한다.
2. 샤도르반
사원에는 샤도르반이라는 맑은 샘물이 있다. 신자들은 기도하러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샤도르반의 물은 깨끗하기 때문에 마셔도 된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종교의식 전에 손을 씻도록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이슬람은 건조한 사막 지방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먼지가 많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정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미흐랍
사원 내 벽면에는 아치형으로 움푹 파인 곳이 있다. 이곳을 미흐랍이라고 하는데 미흐랍은 메카 방향을 향해 만들어져 있다. 전 세계의 모든 모스크는 메카를 향하고 있다.
4. 민바르
미흐랍 오른편에는 민바르라고 부르는 설교대가 있다. 신의 날인 금요일에는 사람들이 모두 모스크로 모이고 카팁이라고 부르는 설교자가 여기에 올라가 설교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