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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신앙과 최영장군

[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 18]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편, 장군신앙이란 살아생전 영웅시되었던 장군의 영혼이 사후에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것을 말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충절을 다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거나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장군이 죽은 뒤 특정인이나 또는 마을 신당에 봉안되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수호하는 장군신으로 봉안되는 것이 장군신앙의 한 면이다.

 

이와 같은 장군신앙 원리를 바탕으로 최영장군신은 말한 바와 같이 무속신앙에서는 물론이고 마을신앙에서나 민중들의 설화을 통해서도 한민족 역사의 위대한 영웅으로 그리고 영험한 신격으로 되살아 있다. 그러한 것은 민중들에 의해 전승되어온 최영장군신앙 관련의 설화를 보면 그러한 측면을 엿볼 수가 있다. 설화에서는 최영장군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최영 장군은 민중들에게 그 자체가 신이한 신격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곧, 민중들로부터 묘사되고 있는 최영 장군은 초월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목을 마음대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인 능력은 다른 장군설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최영 장군이 민중들에게 신격화된 배경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초월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최영 장군이 신손(神孫) 계통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설화 속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최영 장군의 신비적 행적이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최영 장군신은 마을신앙 속에서도 위대한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진다. 예컨대, 서울 마포구 대흥동 416번지 동산에 있었던 ‘불당재’가 그 좋은 예이다. 대흥동 대흥제일교회 뒤쪽 일대의 고개와 마을을 ‘불당재’라고 불렀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당 내부에 명장 최영 장군의 신상을 봉안하고 지역에 자주 발생했던 화재와 질병을 예방하는 마을제사를 정기적으로 지냈다.

 

 

구전에 따르면, 수백 년 전 마을 일대 동막하리(東幕下里)에 자주 화재가 발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던 도인이 덕물산 최영 장군 제단을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 불이 나지 않을 것이라 하여 당을 조성하여 매년 정월과 7월 초에 치성을 올렸고 시월 상달 중 초하루나 초삼일날 대동굿을 지냈었다. 이처럼 무속신앙 속에서의 최영장군은 영험한 장군 신격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하여 나라의 태평성대와 풍년이 듦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존재함은 물론 인간을 수호하고 무당의 영험력을 극대화하고 풍어를 관장하는 신으로 역할 하여 온 것이다.

 

최영장군 신앙은 우리나라 무속의 기본적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강림신앙(天臨信仰)의 한 형태이다. 강림신앙은 고대인들의 생활방식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곧, 고대인의 삶은 신앙과 의례 그 자체였으며 그러한 흔적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알게 한다. 《삼국유사》의 단군, 주몽 또는 혁거세 등의 기록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을 보면, 강림한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의 융합을 통해 인간이 태어나며 그에 따른 삶의 질서인 문화가 창조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따라 고대인들이 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던 천신신앙(天神信仰)은 그들의 일상적 의례로 직결된 것이다. 이러한 추론을 중국 문헌 《삼국지》 「위지 동이전(東夷傳) 기록에 고대 한국인들의 의례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기록의 부여(夫餘)조에는 은(殷) 정월에 천신(天神)을 맞이하여 제천의식을 베풀었는데 이를 영고(迎鼓)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영고(迎鼓)는 무속적 의례인 영신제(迎神祭)로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강림신앙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영고(迎鼓)를 할 때는 반드시 음주가무가 동반되는데, 이는 단순한 오락이나 신명 풀이를 하기 위한 것 말고도 천신을 맞이하여 함께 즐김과 동시에 황홀경의 세계로 접어들어 영적 존재인 신령과 교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최영장군사와 최영장군당

 

최영 장군의 활동은 전국을 무대 삼아 이루어졌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최영의 유적지는 전국 곳곳에 펴져 있다. 그들 가운데, 무속신앙과 관련하여서는 개성 동남쪽의 덕물산(德物山, 해발 288m, 옛 이름은 덕적산-德積山 또는 덕수산-德水山)에 세워진 최영장군사(崔瑩將軍祠)가 가장 대표적이다. 덕물산이 있는 개성은 고려의 옛 도읍지로서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약 78km 거리에 있다. 《태종실록》에 보면, 임금이 명을 내려 덕물산 산신에게 바치는 축문을 지어 올리게 하고 궁궐의 관을 친히 보내 예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덕물산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개성 덕물산이 영산으로 여겨지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최영 장군이 묻힌 적분(赤墳, 풀이 나지 않는 무덤)과 장군의 혼령이 서려 있는 <최영장군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영장군사에 봉안된 최영장군신은 무당들에게는 영험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는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봉안됐다. 이에, 덕물산 최영장군사는 실로 한국 무속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국의 무당은 물론이고 그들을 따르는 신도들이 성스러운 무속신앙의 신앙처로 여겼다.

 

그래서 최영장군사가 있는 덕물산을 만신(萬神)의 조종(祖宗)이라 하고, 맞이굿을 하거나 새 무당을 내는 내림굿을 할 때면 미리 이곳 최영장군사에 제를 올리는 의례를 베푸는 전통이 오래되었다. 신애기가 될 사람이 최영 장군님 전에 그 사연을 고하고 내림굿 하여서 장차 큰 무당이 될 수 있겠는지를 묻는 이른바 ‘물고 받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듯. 계보 있고 족보 있는 큰무당은 제자 입무식(내림굿)을 치르기 전에 덕물산 최영장군사를 찾아 영험한 장군을 찾아뵌 뒤 의례를 베푸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다. 서해안에서 조기잡이 중선을 운영하던 뱃사람들도 연평도 앞바다로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덕물산 최영장군사 쪽을 바라보면서 무사태평과 풍어를 기원하는 뱃고사를 지내곤 하였다.

 

최영 장군이 봉안된 개성 덕물산 최영장군사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자료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택리지(擇里志)》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최영 장군이 민중들의 신으로 등극된 시기는 조선시대 세종 때쯤으로 추측되고 있다. 《택리지》는 조선시대 영조 27년인 1751년에 이중환(李重煥)이 쓴 것인데, 여기에 덕물산의 옛 이름인 덕적산(德積山)과 최영 장군 사당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내용인즉, 덕적산(현재의 덕물산) 위에 최영의 사당이 있고 사당 내부에 소상(채색을 하지 아니한 상(像)이 있는데, 이곳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당 옆으로 침실을 만들어 민간에서 처녀를 뽑아 그곳에 두어 사당을 시봉하도록 했는데 처녀가 늙거나 병들면 새롭게 젊고 예쁜 처녀와 바꾸기를 300년 동안이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최영 사당을 시봉하였던 처녀는 밤이 되면 신령과 접신하여 혼인을 맺기도 했다고 한다.

 

《택리지》가 쓰인 1751년으로부터 본문 내용에 따라, 사당 시봉자를 두었던 전통을 300년 동안이나 했다고 한다면 사당 존립은 적어도 1451년 무렵부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1392년 조선이 개국하여 59년이 지난 뒤이며 조선 제4대왕 세종시대에서 5대왕 문종시대로 넘어가는 때다.

 

이러한 상황을 더듬어 보건대, 덕적산(덕물산) 최영 사당은 조선 초기인 세종시대에 들어 건립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을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고, 그 결과는 문종시대에 보았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한편, 무속신앙 속에서 역사적 실존 인물이 신으로 등극되는 것은 본인이 죽은 뒤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최영장군이 신으로 등극된 것은 그가 사망한 1388년 이후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한편, 최영 출생지는 동주(철원) 또는 개성이나 홍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기록자료에는 동주로 되어 있다. 최영의 무덤은 개성 덕물산의 적분이 있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에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된 또 다른 무덤이 있다. 장방형의 2단 호석을 두른 방형에 사각형 봉분으로 되어 있는데, 약 10m 위편에는 부친 최원직 묘도 있다. 과거에는 이곳의 무덤 역시도 적분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곳에 있는 최영 장군 무덤은 1975년 9월 5일 경기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동주 최 씨 후손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묘 앞에서 최영장군당굿 당주 서경욱 만신이 추모굿을 하곤 하였다. 이는 2003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최영장군당을 조성하여 최영장군당굿을 열어 오고 있는 서경욱 만신은 한때 동주최씨종친회 초청으로 최영장군 시제에 참석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서경욱 만신이 펼치는 최영장군당굿은 최영 장군을 추모하면서 장군의 영험으로 나라의 태평성대와 풍년은 물론 국민의 현세적 길복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