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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 하늘을 우러러 백성의 시간을 담다

인류가 만든 첫 시계, 해시계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7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현대인의 삶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표준시간이 없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요?

 

인류가 처음 활용한 자연시계는 해였습니다. 하지만 해만 올려다보고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 수 있는 해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해시계는 해와 그림자를 만드는 막대기만 있으면 되니 복잡하지도 않고 지구가 자전하는 한 고장 날 일도 없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휴대가 가능할 정도로 작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기계식 시계가 나오기 전까지 다양한 문명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더 많은 백성이 시간을 알게 하라, 오목해시계

 

조선 세종 때 대표적인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하늘을 떠받드는 가마솥[仰釜]’과 같이 오목한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입니다. 보통 해시계는 해그림자가 표시되는 시반면(時盤面)이 평면인 경우가 많은데, 앙부일구는 특이하게도 시반면이 오목한 반구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구’는 ‘해그림자’라는 뜻으로 해시계를 이르는 말입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앙부일구 곧 오목해시계는 세종 16년(1434) 10월 2일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 두 곳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한양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혜정교와 종묘 남쪽을 지나 서대문과 동대문으로 이어졌으니, 백성들이 많이 지나다니던 종로 대로에 해시계가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시각을 알 수 있게 배려한 것이지요. 오목해시계의 제작 목적은 당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었던 김돈(金墩, 1385∼1440)이 지은 앙부일구의 명문(銘文)에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설치해 베푸는 것 가운데 시각을 알려 주는 것만큼 큰 것이 없습니다. … 안쪽의 반구면에 도수를 새기니 주천(周天)의 반이요, 12지신을 그려 넣은 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각(刻)과 분(分)이 뚜렷한 것은 해에 비쳐 밝은 것이요, 길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

 

세종 때 펴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1445)》과 정조 때 펴낸 《국조상역고(國朝曆象考, 1789)》에서는 오목해시계의 본보기가 원나라의 천문기구 제작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앙의(仰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앙의는 해시계의 기능 말고도 일식ㆍ월식 관측이 가능한 천문기구였고, 반구의 지름이 오목해시계의 10배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앙의가 실제 중국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나 그 전통을 이은 현존하는 유물은 없지만, 만일 제작되었다면 궁궐이나 전담 관청에 설치되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천문 관측을 통해 하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명을 받은 제왕이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역법을 정하고 하늘의 이치를 따져 농사에 필요한 때를 알려 주는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세종 때에는 천문 관측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기구를 많이 개발하였습니다.

 

오목해시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시계, 해와 별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 주는 장치를 갖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있습니다. 세종은 이를 권위의 상징물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써서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했습니다. 오목해시계는 대부분 글을 읽지 못했을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12지신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점, 백성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 가에 설치했다는 점에서 백성을 위한 공중 시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백성을 근본에 두는 민본정치를 추구하고자 했던 세종의 뜻이었습니다.

 

새롭게 이어진 오목해시계의 전통

 

세종 때 제작된 다른 과학기구들이 남아 있지 않듯이, 세종 때의 오목해시계도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17세기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오목해시계들은 많이 남아 있어서, 오목해시계의 전통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료와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남아 있는 오목해시계는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오목해시계(보물 제845호)와 같은 청동제 앙부일구가 세종 때 오목해시계와 가장 비슷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구형 안쪽의 시반면에는 눈금을 새겼고 벌어진 윗부분의 가장자리에 눈금과 글자를 새길 수 있도록 바깥으로 평평한 부분을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15도 간격으로 12지와 8간 4괘를 혼합해 24방위를 새겨 넣고, 시침은 정남에 해당하는 위치에 박고 그 끝은 관측지의 북극고도만큼 내려간 시반면상의 지점을 남극으로 하여 남극을 향하게 했습니다.

 

시반면에는 시침을 남북축으로 한 구면 위의 경도선을 시각선으로, 위도선을 절기선으로 삼아 새겼습니다. 각각의 절기선이 끝나는 곳에 24절기를 적었습니다. 시침의 해그림자를 따라 움직이는 절기선을 읽으면 그것이 바로 그날의 절기요, 눈금이 가리키는 지점의 시각선을 읽으면 그때의 시각이 되니, 오목해시계는 ‘한해 가운데 절기’와 ‘하루 가운데 시각’을 동시에 잴 수 있는 해시계입니다.

 

조선 후기의 오목해시계와 세종 때 오목해시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각을 나누는 방법이었습니다. 원래 전통 시법은 12시 100각법이었습니다. 이 시법은 하루를 12 등분 한 시로 나누어 12간지의 이름을 붙이고, 매 시는 초(初)와 정(正)으로 다시 나누어 하루를 24등분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루를 100각(刻)으로도 나누어 매 시의 초와 정에 균등하게 배분되는 맞추었습니다. 세종 때에 쓰던 시법도 100각법이었기 때문에 세종 때 오목해시계에도 당연히 100각법에 따라 눈금을 새겼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시법은 1653년 ‘시헌력(時憲曆)’을 채택하면서 12시 96각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오목해시계에 새겨진 눈금은 모두 12시 96각법에 따른 것이어서 모두 1653년 이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96각법에 따른 시각은 현재의 시각으로 정확하게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들고 다니는 해시계, 휴대용 앙부일구

 

조선 후기에도 시계 제작의 전통은 이어졌습니다. 혼천의와 자명종이 결합한 혼천시계도 만들었습니다. 앙부일구는 관청이나 집, 궁궐 마당에 설치해서 쓰는 고정형뿐만 아니라 휴대용으로도 발전했습니다. 고종 18년(1881) 강윤(姜潤, 1830~1898)과 동생 강건(姜湕, 1843~1909) 형제가 만든 휴대용 앙부일구가 대표적입니다. 매우 정밀하게 제작된 휴대용 해시계일 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이름과 제작 연대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휴대용 오목해시계(보물 제852호)는 동생인 강건이 만든 것으로, 세로 5.6cm, 가로 3.4cm, 높이 2cm 정도의 아주 작은 해시계입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쓸 수 있을 만한 크기입니다. 회백색 대리석으로 틀을 만들고 안쪽에는 시반면을 오목한 반구형으로 깎아 내어 선을 긋고 청동으로 된 시곗바늘을 세웠습니다. 시반면보다 약간 더 작은 원통형의 면을 파서 나침반도 설치했습니다. 휴대용 해시계는 방향을 정확히 맞추어야 제 시각을 알 수 있으므로 나침반을 함께 넣어 만든 것입니다.

 

휴대용 오목해시계의 전면에는 ‘앙부일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앙부일구에는 12간지 글자와 함께 30분 간격의 시각선, 13개의 절기선이 새겨져 있고, 양 옆면에는 절기선을 긋고 그 끝에 24절기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나침반에는 24방위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닥면에는 1871년 4월 하순[동치신미맹하하한(同治辛未孟夏下澣)]에 진주 사람[진산인(晉山人)] 강건(姜湕)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윤, 강건 형제가 제작한 휴대용 앙부일구는 국립중앙박물관 말고도 국립고궁박물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재질이나 모양은 조금씩 다릅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휴대용 해시계는 형인 강윤이 제작한 것으로, 상아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강윤, 강건 형제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증손으로 당시 으뜸 시계 제작자였습니다. 특히 강윤은 고종에게 휴대용 해시계를 제작해 올리기도 했고, 고종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종과 세자의 인장을 만들거나 보수할 때 별감역(別監役)으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인 강이오(姜彝五, 1788~ ?)는 앞서 혼천시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시계를 제작했다는 점도 매우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유새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