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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중 한 사람 ‘원호’를 기리는 관란정

[평창강 따라 걷기 11-3]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작은 다리(산정교)를 하나 건너자 이제 길은 오르막길이다. 고갯길을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 오른쪽에 가지가 길 쪽으로 늘어진 대추나무가 나타난다. 이 지역은 대추나무가 잘 되는가 보다.

 

앞서가던 사람이 대추를 따서 먹어 보더니, 맛이 좋다고 소란을 떨었다. 뒷사람도 대추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집주인 여자가 나타나 앙칼진 목소리로 야단을 친다. 남의 대추를 함부로 따먹는다고. 우리는 당황하여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를 한마디씩 했다. 나도 큰 소리로 ‘미안합니다’라고 외쳤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속담이 맞는가 보다. 우리가 모두 미안하다고 하니, 주인 여자는 우리를 째려보더니 그냥 들어가 버린다. 휴우, 다행이다.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니 대추나무를 심은 집은 살림집이 아니고 ‘한반도 식당’이라는 이름의 간판이 걸려 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인심이 사납다고 생각되었다. 출발한 직후 길가에서 대추를 따 먹었을 때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그런데 길가로 뻗어 나온 가지에서 대추를 따 먹는 행동이 죄가 될까? 예를 들어 담장을 넘어온 감나무 가지에서 감을 따 먹으면 어떻게 되나? 궁금할 때는 슬기말틀(스마트폰)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오성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의 이야기가 검색되었다. 오성이 어렸을 때 오성 집 감나무가 담장을 넘어 이웃 대감집 마당에 이르렀다. 대감댁 하인이 감을 따 먹고는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화가 난 어린이 오성이 대감댁을 찾아갔다. 오성은 창호지로 된 방문을 뚫고 방안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오성은 “이 주먹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묻고 “너의 것”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그러자 오성은 “담장을 넘은 과일도 같은 이치이니 과일값을 물어 달라”고 말하였다.

 

어린 오성이 16세기에 주장한 이론을 현대 민법에서도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민법 256조는 “부동산의 소유자는 그 부동산에 부합한 물건의 소유권을 취득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감나무 뿌리가 이웃집에 있으면 가지가 담을 넘더라도 감은 이웃집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시골길을 걷다가 함부로 감이나 대추를 따 먹으면 안 된다. 이웃집 주인이 모두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고개 정상에 다다르니 왼편에 ‘한반도 펜션’ 간판이 보인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오른쪽에 ‘한반도 캠핑장’이 나타나고. 이 동네 사람들은 한반도라는 이름을 좋아하나 보다. 그런데 근거가 있다. 강 건너편 북쪽에 유명한 한반도지형이 있어서 너도나도 한반도라는 이름을 썼을 것이다. 봉평 사람들이 이효석 이름을 곳곳에 쓰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고개를 내려가면서 왼쪽을 보니 드디어 평창강이 나타났다. 꽤 높은 석회암 절벽이 보인다. 길 왼편에 절벽이 있고 그 아래로 평창강이 흐른다. 강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강물 소리가 우리가 걷는 길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강가로 내려가지 않고 사진만 찍었다. 카카오맵에서는 강 이름이 서강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길 왼쪽에 집 하나가 나타나는데, 문패처럼 작은 표시판을 만들어 놓았다. 표시판에 ‘꽃병마을愛‘라고 쓰여 있다. 집 이름이 멋있다고 생각되었다. 주인장이 있으면 물어보고 싶은데 인기척이 없다.

 

 

꽃병 마을. 마을 이름이 예쁘다. 왜 꽃병 마을이라고 했을까? 답사 후에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강 건너 사정리에 있는 각시바위와 강의 오른쪽 언덕에 있는 신랑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마을의 위치가 신랑 신부가 혼인할 때 대나무를 꽂아놓는 꽃병의 위치에 해당하므로 마을 이름을 ‘꽃병’이라고 부르고, 절개를 상징하는 푸른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

 

뭔가 근사한 전설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조금은 싱거운 설명이다. 또 조금 아쉬운 것은 ‘좋은데 왜 거기다 한자 ’愛‘를 붙였을까다. 우리말에 한자를 붙이는 것이 광고에 유행하더니 이런 시골 사람들까지 그 유행을 따르고 있다. 결국 저런 것이 우리말을 헤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조금 가다 보니 멀리에 고가도로처럼 생긴 구조물이 보인다. 모양으로 보면 석회석을 옮기는 운반로 같다. 위치로 볼 때 근처의 석회석 광산에서 쌍용양회 공장으로 석회석을 운반하는 구조물로 보인다. 왼쪽 강가에 있는 넓은 수수밭에서는 익은 수수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수수밭은 이날 여러 번 보았다. 이 지역에서는 수수가 잘 되나 보다.


 

 


 

 

오른쪽에 마을이 나타나고 입구에 정자가 있다. 정자 주변에 꽃나무가 많고 근사한 소나무도 있어서 쉼터로서 좋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우리는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그런데 흠이라면, 가까이에 축사가 있는지 농촌 향수 냄새가 은은히 풍겨온다.

 

 

 

꽃병마을 정자에서 30분 동안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쉬었다. 평창강 따라 걷기는 모두 14구간으로 나누었는데, 앞으로 세 구간이 남았다. 나는 일행에게 남은 세 구간을 10월에 모두 걸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창에서 6년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10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단풍이 아름답다. 다음 답사 때부터는 단풍이 아름다운 평창강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나올까 기대가 된다.

 

오후 4시 30분에 꽃병마을 정자를 출발하였다. 화병교 다리를 건너니 한반도지형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로’가 나타난다. 화병교라는 다리 이름은 꽃병을 화병이라고 바꾼 것 같다. 그냥 ‘꽃병다리’라고 불러도 좋을 텐데 왜 굳이 화병이라고 한자어를 썼을까?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스쳤다.
 

 

 

한반도로를 따라서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다가 4시 45분에 서석이라는 카페 입구에서 11구간 답사를 마쳤다. 이날 11.9 km를 걷는데 4시간이 걸렸다. 한반도면사무소로 되돌아가 호돌이 식당에서 불고기 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뒤에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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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후기>

 

나는 답사 코스를 계획하면서 손말틀(휴대폰)에 깔린 카카오맵을 이용한다. 카카오맵에는 평창강 11구간 코스 근처 강가에 관란정이라는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길은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나는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한반도습지 감시초소 직원과 이야기해 보니 관란정까지 길이 나 있고 사람이 걸어갈 수 있다고 한다.

 

답사 다음 날 나는 사진도 몇 장 추가할 겸 11코스를 다시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면장터로’에는 ‘원호유허비 및 관란정’이라고 쓴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지방기념물 제92호 거리 400m라고 표시되어 있다. 길 따라 들어가 보았다. 작은 언덕 위에 근사한 정자가 나타났다.

 

 

관란정은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원호(元昊, 1397~1463)를 기리기 위한 정자이다. 관란정은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2리의 경계인 절벽 위에 있다. 원호의 호는 관란(觀瀾)인데, 관란이란 ‘흐르는 물을 본다’는 뜻이다. 원호는 1423년(세종5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원호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직하고 고향인 원주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단종이 죽자 원호는 영월에서 상복을 입고 3년상을 마쳤다. 그 뒤 세조가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삶을 마쳤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1845년(헌종 11년)에 원호의 충의를 기리고자 정자를 세웠다.

 

1995년 엄흥용 저 《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의 330~331쪽에 관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관란정은 청령포로 흐르는 주천강(필자 주: 주천강이 아니고 서강이라고 해야 맞다.) 상류로서 집현전 직제학인 생육신 원호가 영월로 유배 온 단종대왕을 위해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다. 원호가 청령포를 바라보며 매일 통곡을 하자 빨래를 하던 어떤 여자가 우는 연유를 물었다. 이때 원호가 말하기를

“열녀는 두 남편을 갖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라오. 내가 모시던 임금이 청령포에 귀양 와 계시므로 슬퍼서 우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때 이 여자도 울면서

“제가 며칠 후에 개가를 하려고 했는데 어르신네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면서 끝내 수절을 했다고 한다.

 

원호는 단종 대왕을 그리며, 함지박에다 음식과 함께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떠내려 보내면 여울살을 따라 청령포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여라

이제야 생각하니 님을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도록 나도 울어 보내리라

 

원호는 단종이 승하하자 수주면(필자 주: 현재는 무릉도원면이라고 부른다) 무릉리 토실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원주 단구동(무학동)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조 임금은 교지와 함께 시호를 정간공(貞簡公)이라 하고 수주면 토실마을에 모현사(慕賢祠)라는 사당을 세워주었다. 1834년(순조34) 평창군 봉평면 원길리에서 출생하여 이항노(李恒老)의 학통을 이어받은 봉서(蓬西) 신범(辛汎)은 영월기행문인 월행(越行)에서 관란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높이 솟은 절벽은 열사의 정성이 담겨 있고

누각에 오르니 오간성이 지척이네

정자는 멀리 절벽을 바라보며 서 있고

여울은 지난 일 생각하며 옛날과 같이 울며 흐른다.

청령포는 아득하게 구름이 비추고

고요한 관풍헌에는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누나

표주박 서신 끊겼으니 소식은 알 수 없고

천지는 유유하고 일월만 밝구나

 

관란정에서 내려다본 평창강(서강) 사진을 추가한다. 내려다보이는 지역이 한반도습지 보호구역이다. 강은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사진에서 한반도지형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