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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한글로 시를 쓴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고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녹우당(綠雨堂)은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1587 ~ 1671)가 살던 고택이다. 녹우당을 처음 지은 사람은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1476~1548)으로 이 집은 16세기에 지어진 남도지방의 양반가옥이다.  당시 집들은 남자들이 주로 쓰는 공간으로 사랑채가 앞에 있고, 여자들이 주로 쓰는 공간 안채는 사랑채 뒷편에 있으며, 집안 옛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은 집 맨 뒷편에 지었다.

 

녹우당의 현재모습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윤선도에게 효종이 내려준 수원 집을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집을 옮겨지은 때는 현종 9년(1666)으로 수원에 있던 집을 해체하여 목재를 뗏목에 싣고 서해바다를 돌고 돌아서 이곳에 왔다고 하니, 그 일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은 것이 녹우당 사랑채다. 

 

녹우당 사랑채는  "ㅡ"(일자형)으로 "ㄷ" 자 형 안채 앞에 지음으로써 이 집은 :ㅁ"자형 집이 되었다.  녹우당 출입은 남자들은 주로 사랑채 마당 정면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맨 바깥 행랑채 옆에 낸 동쪽 솟을 대문으로 들어가는데, 대문을 들어서서 사랑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보면 "ㅡ"자로 길게 펼쳐진 사랑채가 있는 것이다. 

 

한편 여자들은 사랑채 대문으로 드나들지 않고 동쪽으로 돌담을 돌아서면 중문이 있는데, 이 중문을 통하여 들어온 뒤 사랑채 옆을 돌아서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이면서 성리학적 윤리사상이 지배하던 시대로 사대부들이 살아가는 집의 배치구조 또한 그 사상을 적용하였다. 

 

녹우당은 조선시대 성리학적 삶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선비들 집으로, 집은 크지만 화려한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 어쩌면 수수하면서도 담백한 집이다.  그런데 이 집이 녹우당으로 이름지어진 연유는  운선도의 증손인 윤두서(1668 ~ 1715)의 친구였던  '이서'가 이 집에 머물 때, 잠을 자다가 빗소리 인줄 알고 깨어보니 빗소리가 아니라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혀 나는 소리임을 알고, "푸른비가 내리는구나"라고 하면서 집의 당호를 녹우당으로 써준 데서 유래한다.

 

윤선도는 한문에 통달하였으면서도 한글로 시를 지어 한글 가사문학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훌륭한 시인이었다. 그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오우가(五友歌) 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있다. 오우가는 사람이 아닌 자연에서  찾은 변치않는 친구로,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을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로 노래한 것이고,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라 살아가는 어부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녹우당은 조선시대 매우 중요한 건축물로 현재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 집은 현재 해남윤씨의 자손이 관리하고 있는 까닭에 아무때나 들어갈 수 없고, 방문목적을 미리 알린뒤 시간이 서로 맞으면 후손의 안내를 받으며 관람할 수 있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