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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의 토박이말 이야기

[숨 가쁜 삶에 숨 돌릴 틈 하나]말미

[하루 하나 오늘 토박이말]말미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오늘 아침, 바다 건너에서 날아온 기별이 제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으뜸빛(대통령)이 나랏일 하는 일꾼들에게 예수님오신날(성탄절)을 앞뒤로 하여 사흘 동안 쉴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별을 들을 때 '휴가(休暇)'나 '휴무(休務)'라는 한자말을 먼저 떠올립니다. "특별 휴가를 주었다"거나 "휴무일로 정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말들은 어쩐지 '일을 딱 멈춘다'는 딱딱한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오늘은 이 차가운 겨울, 여러분의 마음에 따뜻한 아랫목 같은 토박이말, '말미'를 꺼내어 볼까 합니다.

 

'말미'라는 말을 읽어보면 참 부드럽고 둥글둥글하지 않나요? 이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떤 일에 매인 사람이 다른 일로 말미암아 얻는 시간적인 틈'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저 노는 게 아니라, 어떤 까닭이 있어 얻게 된 값진 틈을 뜻하지요.

 

이 말의 뿌리를 캐다 보면 그 맛이 더 깊어집니다. '말미'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미암다(까닭이 되다)'와 뿌리가 같은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말미를 얻다"라고 하면 "어떤 까닭이 있어 쉴 겨를을 얻다"는 뜻으로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미'는 그저 펑펑 노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까닭을 가지고 숨을 고르는, 참으로 마땅하고 값진 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 말꽃 지음몬(문학 작품) 속에서 더욱 제 맛을 냅니다. 한무숙 님의 소설 <<만남>>을 보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대목이 나옵니다.

"이틀의 말미는 스승을 위하여, 스승이 좋아하는 비자를 구해 오고자 했던 정성에서 온 것이었다."

 

어떤가요? 여기서 '말미'는 그저 비어 있는 때새(시간)가 아닙니다.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갸륵한 마음이 깃든 때새(시간)지요. "휴가를 냈다"라고 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누군가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말미'라는 낱말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멋스러운 말을 오늘날 우리 나날살이(일상생활)에는 어떻게 들여놓을 수 있을까요? 먼저, 딱딱한 기별부터 부드럽게 다듬어 보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공무원들에게 특별 휴무를 지시했다"는 말을 갈음해, "나랏일로 고단했던 일꾼들에게 사흘 동안의 달콤한 '말미'를 주었다"라고 바꿔 보는 겁니다. '휴무'가 틀스러운(기계적인) 멈춤이라면, '말미'는 그동안의 애씀을 알아주고 베푸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다가 올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는 마주이야기에서도 이 말을 써보세요. 밤늦도록 일하느라 지친 동무에게 "언제 쉴 수 있어?"라고 묻기보다 이렇게 건네는 겁니다. "네 얼굴이 많이 힘들어 보여. 윗분께 말씀드려서 '말미'를 얻어 좀 쉬고 와." 쫓기듯 사는 삶 속에서 '말미'라는 말 한마디가 듣는 이에게 숨 쉴 구멍을 틔워줄 것입니다.

 

누리어울림마당(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릴 때도 좋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찍그림(사진)과 함께 이렇게 적어보세요. "숨 가쁘게 달려온 올 한 해. 오늘은 나에게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말미'를 주었습니다. 참 좋다, 이 겨를."

 

한 해를 갈무리하는 마지막 달,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매여 바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활시위도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기 마련이죠. 오늘 하루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은 '말미' 하나 내어주는 넉넉함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그 짧은 겨를이, 다시 힘차게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뿌리가 되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