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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돌아보며 다시 생각했으면 하는 사진과 글을 <10개> 정도 찾아올리려고합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라 '고치고 바로잡기 위한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댓글 좀 주시고 제게도 연락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이윤옥 : 59yoon@hanmail.net 
 
                                 저무는 길목 12월 3일 이윤옥 사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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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우리말 생각  

< "단차"를 올리며 3.1절에 생각한다 >
                                                                       2010.3.1

▲ 왼쪽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 던 중 만난 표지판과, 오른쪽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 앞 도로공사현장에 표시된 "이 앞에 단차 있음"이라는 안내판



1919년 3월 1일
그들의 총칼 앞에 우리는 맨손으로 항거 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포악한 식민의 역사에 항거 했다
있는재산 없는 재산 다 팔아 독립자금에 보탰고
수류탄을 가슴에 품고 "식민"을 영구화 하려는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사는 이유와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조국의 독립이었다
이완용과 이광수 같은  자만
빼고 우리는 모두 똘똘 뭉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로 빼앗긴 말과 나라를 되찾은지  65년 째이고
3.1만세운동으로부터는 91돌을 맞는다

그러나 조선 곳곳은 아직도 일본말로 물들었으며
이를 청산코자하는 의지가 전혀없다.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가슴아파하지도 않는다.

아!
어찌하랴!
이런 넋 나간 겨레를...함바식당을 해서 돈을 벌어 집을 불리고 재산을 불리는 일에는 관심이 있지만 우리말글을 살리고 올 곧은 정신을 기르는데는 거의 무신경이다.

전국대학의 국어학과가 있고 국립국어원이 있어도 역부족이다.
언론이 아직도 "쓰나미"를 외치고 국민들이 "와리바시"로 "사시미"를 먹는 한
우리의 해방은 먼 것이다.

흥분을 감추고...
지난 1월 일본에 있을 때 와세다대학 앞  도로 공사 표지판에서 만난
단차<段差>와  지난해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가면서 공사 구간에서  만난
<단차주의>는 극명한 우리들의 "말글"에 대한 철학과 자존심 부재를 드러냈다.

부끄러운 일이다. 거리엔 태극기가 펄럭이지만  진정한 나라사랑의 길이 무엇인지 새기고 있는지 오늘 3.1 만세운동 91돌에 묻고싶어진다.


<황국신민 이광수의 창씨개명 궤변을 들어보자>『매일신보』 1940년 2월 20일

내가 香山(향산)이라고 氏를 創設(창설)함에 대하야 혹은 面對(면대)하여서 혹은 書柬(서간)으로 내 창씨의 동기를 뭇는 이가 잇다. 대다수는 나의 香山(향산)이라는 창씨에 대하여서 비난하지마는 또 그 중에는 찬성하는 이도 잇고 창시에 대한 의견을 뭇는 이도 잇섯다. 오늘 내가 바든 익명인의 편지에는 나의 창씨를 강하게 비난하고 그 동기와 이유를 발표하는 것을 요구하엿다. 반드시 이 익명인의 서간에 응함만이 아니나 이 때를 당하야 나의 태도에 대하여 一言(일언)할 필요가 잇슴을 통감한다.

창씨의 동기
내가 香山(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光郞(광랑)이라고 일본적인 名(명)으로 改(개)한 동기는 惶悚(황송)한 말슴이나 天皇御名(천황어명)과 讀法(독법)을 갓치하는 氏名(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깁히깁히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끗헤 이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굿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李光洙라는 氏名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香山光郞(향산광랑)이 조곰 더 천황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엿다. 이에 내선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업시 될 것박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잇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갓 노력을 할 것박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잇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깃브게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香山(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하엿다.

便宜(편의)
압흐로 점점 우리 조선인의 씨명이 국어로 불려질 기회가 만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광수보다 香山光郞(향산광랑)이 훨신 편할 것이다. 또 만주나 동경 大阪(대판) 등에 사는 동포로는 일본식의 씨명을 가지는 것이 실생활상에 만은 편의를 가저올 것이다.

결심
우리의 재래의 성명은 支那(지나)를 숭배하던 祖先(조선)의 유물이다. 永郞(영랑), 述郞(술랑), 官昌郞(관창랑), 初郞(초랑), 所回(巖)(소회암), 伊宗(이종), 居柒夫(거칠부), 黑齒(흑치), 이런 것이 고대 우리 先祖(선조)의 이름이엇다. 徐羅伐(서라벌), 達久伐(달구벌), 齊次巴衣(제차파의), 홀골, 엇내, 이런 것이 옛날의 지명이엇다. 그러한 지명과 인명을 支那式(지나식)으로 통일것은 불과 6,700년래의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支那人(지나인)과 혼동되는 성명을 가짐보다도 일본인과 혼동되는 씨명을 가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밋는다.

그럼으로 나는 일본인이 되는 결심으로 씨를 香山(향산)이라고 하고 명은 光郞(광랑)이라고 하엿다. 내 妻子(처자)도 모조리 일본식 명으로 고첫다. 이것은 충성의 一端(일단)으로 자신하는 까닭이다.

정치적 영향
금년 8월10일까지 조선인이 창씨의 기한이 끝난다. 그 날의 결과는 정치적 영향에 큰 관계가 잇다고 나는 밋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달앗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 2천4백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에 철저하엿다는 중대한 추리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와 反(반)하야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불과하다 하면 그것은 불행한 편의 추리자료가 아니 될 수 업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신임하고 아니 함이 조선 자신의 幸不幸(행불행)에 크게 관계가 잇슬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적인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나는 밋는다.


『매일신보』 1940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