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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2464. 정약용이 탄복한 청렴한 선비 점범조

   

“정조 경신년(1800) 여름, 나는 법천에 갔는데 해좌공이 손을 붙잡으며 기쁘게 맞아주셨다. 그때 집안사람이 벽장의 시렁 안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 가지고 나가니, 공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찬찬히 살펴보니, 대체로 식량이 떨어진 지 며칠 된 형편이었다. 종이를 팔아 70전을 얻어서 쌀을 사고 말린 고기 한두 마리를 사서 손님들을 대접해주었는데, 그 종이는 비문(碑文)이나 비지(碑誌)를 청하는 자가 폐백으로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태연한 모습이어서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

위 글은 다산 정약용이 해좌 정범조에게 채제공의 비문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고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랐으며, 학문과 문장도 뛰어났지만 청렴하고 단아한 인품 때문에 더욱 추앙을 받았고, 18세기 정조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입니다.

그 정범조는 식량이 떨어진지 며칠이 될 정도로 살림 형편이 어려웠지만, 찾아온 손님에게 내색을 하지 않고 폐백으로 받은 종이 마저 내다 팔아 대접했던 것이지요. 공자는 “도(道)를 걱정해야지 가난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君子憂道 不憂貧)”고 강조했는데 정범조는 그런 교훈을 지킨 셈입니다. 그가 떠난지 200년이 되는 요즈음 정범조 같은 선비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