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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 온 명창들의 이야기 Ⅱ

[국악속풀이 109]

[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1>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이 박유전의 강산제 <심청가>와 <수궁가> 등도 익혔다는 이야기, 제자들이 말하는 정응민은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는 스승이었으며, 제자를 심하게 다그치거나 야단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보성소리의 이론적 기반은 정심(正心), 정음(正音), 사채라는 이야기, 재미위주의 소리나 너름새를 원한다고 해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성소리를 진중한 무게, 남다른 품격이 느껴지는 소리라고 입을 모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정응민은 그의 아들 정권진이 판소리를 시작하려 하자 “노력 끝에 명창이 된다 하여도  대우도 못 받고 고되니 그 공을 학문하는데 쓰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자에게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판소리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전통음악분야에서도 자녀에게 세습을 원치 않은 부모의 만류 이야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소리가 좋아서, 악기를 만지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춤을 배우기 원하는 자녀들을 집안에 감금시켜 놓고 바깥나들이를 금지시킨 부모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경험담이다. 그래서 부모 몰래 집을 뛰쳐나가 갖은 고생을 이겨가며 소리를 배우고 재주를 익혀 왔던 예인들 중 오늘날 대성한 예인들의 면면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녀들의 재기를 억지로 덮어두고 반대하였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특히 전통음악분야가 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거나 노력에 대한 보상이 낮기 때문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부모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이 뒷받침 된다고 해도 명창이며 명인 반열에 오르기 힘든 과정인데, 지원은커녕 철저한 반대 속에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이겨내야 했으니 전통음악인들의 불굴의 용기는 과연 높이 사고도 남을 일이 아닐까 한다.

   
▲ 정권진 명창의 '심청가' 음반 표지

보성소리의 큰 줄기로 평가받고 있는 정권진 명창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권진 명창에 관한 이야기는 최동현 교수가 인터뷰를 통해 상세하게 조사한 바 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정권진은 어려서부터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를 듣고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소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일곱 살이 되어 서당에 다닐 무렵에 어지간한 소리는 다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진은 부산으로 가서 이버지의 제자인 박기채에게 여러 해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강진의 ‘고성사’라는 절에 들어가 5년 정도 독공을 하였으며 50년대 후반에는 군산, 대구, 대전 등지의 국악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961년 이후 국립창극단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국악예술학교를 비롯한 교육현장에서 공연과 후진양성을 병행하였다고 전한다.

정권진은 소리 공부하는 방법도 아주 흥미로워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소리 한바탕을 다 불러본 다음, 가성을 사용하여 어려운 목들을 연습하고, 이렇게 학습하면서 아침이 지나면 모든 사설을 자진모리가락으로 바꾸어 불러보기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간혹 원장단을 빠른 곡조로 불러보기도 하고, 빠른 장단의 노래는 느린 속도로 불러 보면서 섬세한 채색을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산에 가서는 하성에서 시시상성까지 뱃심이 오를 때까지 힘껏 소리를 질러 산울림으로 자신의 음질이나 음량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다듬어 나갔다고 증언하였다. 이 같은 훈련에 의하여 정권진은 정응민의 판소리 바디를 충실하게 이어받은 명창이 되었으며, 정응민이 추구한 대로 판소리를 가장 진중한 예술 쪽으로 이끌어간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보성소리는 흔히‘방안소리’라고 말한다. 양반들의 세계관이 판소리의 사설과 곡조에 깊이 침투한 이유로 우아한 사설을 아정한 방식으로 불러 점잖은 소리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감정이 지나치게 넘치지 않도록 절제하여 부르는 미학적 원칙을 지니고 있는 탓에‘소리가 쫄깃쫄깃하다’거나, 속기어린 광대기를 강조하거나, 과장된 너름새로 판을 휘어잡는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또한 이 소리제는 음악적 요소, 즉 장단의 변화나 엇붙임, 시김새 등이 고도로 발달하였다. 그래서 이 유파를 기왕의 소리제에 비하여‘신제’소리로 인식하였다고 한다.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온 명창으로 정응민의 아들 정권진은 아버지가 추구한 판소리의 길을 진지하게 이어 받아 무게 있는 대명창으로 활약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한국 전통음악학회 회장
전통음악진흥연구소 소장
충청남도·경상북도 문화재 위원
한중 학술 및 실연교류회 한국측 대표
UCLA. Korean Music Symposium 대표

누리편지 suhilkw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