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그의 아들 정권진을 소개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를 듣고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소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 50년대 후반에는 군산, 대구, 대전 등지의 국악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국립창극단과 교육현장에서 공연과 후진양성을 병행하였다는 이야기, 그만의 특이한 훈련방법으로 정응민의 판소리 바디를 충실하게 이어받은 명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호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 전승의 특징을 가장 명쾌하게 전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조상현 명창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유영대교수의 “김세종제 춘향가의 전승자들”이란 글을 보면 조상현에 관한 재미있는 글들이 있다. 이을 참고해 보면 조상현의 선친은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서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 소리를 하는 조상현 명창
열두어 살 무렵 마을에서 소리하는 분에게 단가 몇 마디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싹수가 있다고 칭찬이 자자해 지자, 그는 열세 살 되던 해 회천면의 정응민 선생 댁을 찾아간다. 선생 집에 들어가 집안일을 도우며 그 집 식구와 일곱 해를 살면서 소리를 배웠다. 그동안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 세 바탕소리를 익히게 된다.
그가 소리를 배우러 들어갈 때만 해도, 정응민 선생댁에서는 아무도 소리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는 소리공부를 하고, 낮으로는 소깔도 베고, 소도 먹이고, 쇠죽을 쑤면서 깔땀살이를 하였다. 소를 뜯기러 들에 나가서 그날 배운 소리를 하노라면 그의 맑고 화려한 소리가 넓게 퍼져나가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고된 줄을 몰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명창이라고 칭찬하는 것 이외에도 명창 임방울에게서도 비슷한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한 번은 임방울 명창이 정응민 선생 댁에 들렀다가 조상현이 소리하는 것을 듣더니, “목이 좋네 좋네 해도, 이놈 같이 목이 좋은 놈은 첨 봤네. 형님이 성냥깐에서 두들겨만 주쇼. 팔기는 내가 팔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조상현은 성냥깐에서 두들기라는 소리를, 자신을 두들겨 패라는 소리로 잘못 알아들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조상현의 말이다.
“내 이름이 거기서는 ‘세또’요. 시방도 ‘세또’라면 통하지요. 그거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세빠또’에서 가운데 ‘빠’ 자를 빼고 부른 것이지요. 그것은 김명환 선생님이 내가 세빠또 모양으로 심부름을 잘헌다고 내게 붙여준 별명이지요. 심부름 시키면 금방 달려갔다 오지요. 거그서 율포가 솔찬히 먼디, 거를 금방 갔다 오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어요. 많이 다닐 때는 하루에 여덟 차례를 율포에 다녀온 적도 있지라우.”
나중에 보성 정응민 선생 댁에는 김명환, 성우향, 안채봉, 박금선 같은 분들이 소리 공부하러 들어왔다고 한다. 자신이 먼저 들어와 공부를 했지만, 나이가 원체 위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심부름을 도맡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 그는 설탕가루를 아주 좋아하여, 누가 설탕가루라도 한 줌 줄 양이면 무슨 심부름이고 다 번개처럼 해 줬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소리를 배우는 즐거움에 고생처럼 생각되지 않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스승에게 심하게 혼난 적이 있었다. 혼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치도곤을 당하여 한동안 스승과 헤어져 있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김명환이 어린 그에게 북을 가르쳐 줬는데, 아주 ‘쇠명하게’ 잘 받아 배웠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배운 소리를 익히는 일보다 북치는데 온갖 신경을 다 빼앗겼다.
공식과 방법을 배워 그것을 익혀나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저 북만 붙잡고 살다시피 하였다. 한 번은 광주에 가서 북을 치는데, 일산 김명환이, “문 닫아 놓고 치면 자네 북인지, 내 북인지 분간을 못 허겠네”라며 칭찬까지 해 줄 정도가 되었다니 그의 북 솜씨도 알만한 것이다. 조상현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한다.
“그래서 한참 때는 북을 오히려 소리보다도 더 좋아했어요. 북에 취미를 붙이니 북이 늘어가고, 소리에 맞어 들어가니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요. 선생님하고 북이 비슷하단 말씀은 언감생심, 하늘과 땅 차이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가락 하나 가르쳐주면 그것이 소리와 접합이 되어서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지요.
그래놓으니, 북을 잘 친다고 안채봉 씨나 박금선 씨가 밤낮으로 북을 쳐달라고 해요. 그렇게 북을 쳐대다 보니까 소리를 잊어버렸어요. 그때는 일주일 단위로 강을 받을 땐디, 그때 천자뒤풀이를 선생님 앞에서 하다가 <취지여일(就之如日) 날 일(日)>까지 부르고 그 뒷대목이 생각이 안나요. ‘취지여일 날 일’‘취지여일 날 일’--- 이렇게 거기서 웅얼거리자, 선생님이 ‘웬 놈의 취지여일이 그렇게 많냐’고 소리치시면서 북통을 던져버렸어요. 그러고는 ‘너 이놈 내 앞에 다시 올라면 다시 다 해갖고 와’ 하며 자리로 돌아가셨지요.”(다음호에 계속)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누리편지 suhilkwan@hanmail.net
한국 전통음악학회 회장
전통음악진흥연구소 소장
충청남도·경상북도 문화재 위원
한중 학술 및 실연교류회 한국측 대표
UCLA. Korean Music Symposium 대표